티스토리 뷰

임진왜란의 명장, 김명원선생 묘(1602)

 

지 정 번 호 : 향토문화재 제10호

                              소 재 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관산동 산71-1

 

김명원선생묘(金命元先生墓)는 관산동 경주김씨 묘역에 서향(西向)으로 위치하고 있으며 정경부인 청주한씨(貞敬夫人 淸州韓氏)의 묘와 쌍분(雙墳)을 이루고 있습니다.

묘 앞에 세워져 있는 신도비는 숙종 21년(1695) 5월에 건립된 것으로 장방형 비좌와 옥개, 비신을 갖추고 있습니다. 비의 앞면에는‘평란공신 좌의정 경림부원군 증시충익 김공신도비명(平難功臣左議政慶林府院君贈諡忠翼金公神道碑銘)’이라 전자되어 있습니다. 비문은 이정구(李廷龜)가 짓고 김종연(金宗衍)이 썼으며 김창협(金昌協)이 전(篆)을 하였습니다. 비문은 대체로 판독이 가능할 정도로 보존 상태가 좋으나 곳곳에 총탄 자국이 나 있으며 훼손된 곳도 있습니다.

김명원은 조선 중기(中期)의 문신으로 중종(中宗) 29년 (1534)에 출생하여 선조(宣祖) 35년(1602)에 돌아갔습니다. 자는 응순(應順), 호는 주은(酒隱)이며 본관은 경주(慶州)로서 관찰사 김만균(金萬鈞)의 아들입니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명종(明宗) 13년(1558)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3년 뒤 식년문과(式年文科) 갑과(甲科)로 급제했습니다. 선조 2년(1569) 종성부사(鐘城府使) 등 내외직을 역임하였고, 선조 20년(1587) 좌참찬(左參贊)으로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를 겸임하였습니다. 선조 22년(1589)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을 수습하는 데 공을 세워 평란공신(平難功臣) 3등에 올라 경림군(慶林君)에 봉해졌습니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순검사(巡儉司)가 되고 이어 팔도도원수(八道都元帥)로서 임진강(臨津江) 방어전을 벌여 적의 침공을 지연시켰습니다. 난중에 행재소(行在所) 경비에 전력했고 이듬해 명나라에서 원병이 오자 병으로 도원수의 자리를 내놀고 호조⦁예조⦁공조의 판서를 역임하였습니다.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병조 판서로 유도대장(留都大將)을 겸임하여 전장에 나가 지휘하였습니다. 그 후 좌찬성, 이조판서, 우의정 등을 역임하고 선조 33년(1600)부원군에 진봉되어 좌의정에 올랐습니다. 유학에 조예가 깊고 병서, 궁마에도 능하였으며, 시호는 충익(忠翼)입니다. 신도비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하는데 임진왜란 때 김명원 선생이 거둔 명성은 대단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임진년(1592) 난리가 일어나자 다시 순검사(巡檢使)가 되었으며, 얼마 되지 않아 8도 도원수(都元帥)에 제수되었다. 임금이 서쪽으로 피난가니 도성(都城)의 사람들이 크게 동요하였는데, 김명원 공은 상중(喪中)에도 종군(從軍)하여 임진강(臨津江)에 물러나 진을 치고 흩어진 병사들을 소집하여 방책(防柵)을 세우고 여울로 방어하였다. 형세가 차차 정돈되어 적(敵)이 감히 쉽게 넘보지 못하자 김명원 공이 또한 병사들을 타일러 움직이지 않게 하였다. 조정에서는 그가 출격(出擊)하지 않음을 의심하여 사람을 보내 독촉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강을 건너갔다가 적의 복병(伏兵)을 만나 크게 패하여 신길, 유극량 등이 모두 죽었다. 김명원 공은 임진강 하구로 달려가 남은 병사들을 거두어 후퇴하던 차에 적이 평양을 함락하였다. 김명원 공은 순안(順安)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유격(遊擊) 기마병(騎馬兵)이 날마다 부현(斧峴)으로 출몰하였다. 김명원 공은 밤낮으로 진영을 떠나지 않았으며 옷을 벗지도 않았다. 요새지(要塞地)에 여러 장수들을 배치하여 적의 진로를 막아 행재소(行在所:임금이 머무는 곳)를 호휘하니 적이 감히 서쪽으로 나오지 못하였다. 중국 장수 사유(史儒)가 경솔하게 진격하였다가 패하자 한결같이 크게 놀라며 모두 적병이 곧 쳐들어온다고 말하였다. 그때 임금의 행차는 용만(龍灣:의주(義州) 근처 압록강 나루)에 머물러 있었는데 어떤 이는 김명원 공에게 빨리 행재소에 이 사실을 알리라고 청하였다. 공은 말리면서 말하기를

『조금 기다려 동태를 살펴도 늦지 않다.』

라고 하였는데 조금 뒤에 적의 움직임이 없다는 것을 듣고 군대의 부하들이 감복하였다.

방어사(防禦使) 김응서(金應瑞)가 조정에서 진병(進兵)을 경계하고 있는 줄 알면서도 여러 번 공첩을 보내 싸움을 청하여 김명원 공을 시험하자 싫으면서도 공첩대로 시행하기로 하였다. 순찰사 이원익(李元翼) 공이 곁에 있다가 놀라며 말하기를

『공은 어찌하여 조정에 품신(稟申)하지도 않고 곧바로 싸움을 허락하는가?』

라고 하였는데 공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윽고 김응서가 출병하여 배회하였으나, 적을 보지도 못하고 돌아갔고, 공도 또한 이를 묻지 않았다. 다만 이원익 공에게만 사사로이 말하기를

『저 사람은 마음이 곧지 못하니 삼가 가벼이 믿지 마시오.』

라고 하니 이원익 공은 혀를 내둘렀다.

계사년(1593)에 중국 군대가 와서 김명원 공의 계책과 대응방법을 도와주었는데 움직임의 기미와 의당함을 주선하자 중국 장수가 그 의견에 따라서 싸울 때에는 반드시 김명원 공에게 자문을 구하였다.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