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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장군 묘지 안내판이다

고양동 누리길은

필리핀참전비에서 시작하여

최영장군 묘

고양 향교

중남미 문화원

선유랑 체험마을

안장고개까지 이어지는

총 길이 7.1km이며

2시간 40분이 걸린단다

지도를 크게 확대한 모습이다

묘지가 많은 곳으로 보아

길지인 것 같다

고양동 지역

주요 관광지를 소개한 내용이다

필리핀 참전비

- 6.25 한국동란에 참전한

  필리핀 지상군 1대대를 기리기 위해

  건립한 것이다

최영장군묘

- 최영장군은 고려말 대표적 충신으로

  수많은 전투에서 홍건적과 왜구를 물리친 명장이다

중남미 문화원

- 마야, 잉카, 아즈텍의 문명을 한 눈에 볼 수 있으며

   야외전시관, 미술관 등이 있다

고양향교

- 공자 및 성현들의 제례를 담당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설립한

   조선시대 지방 교육기관이다

필리핀 참전비의 모습이다

필리핀은 1950년 9월 19일에 참전하여

왜관, 김천, 대구, 임진강변, 철원지구 전투 등에

참전하여

사망 92명, 실종 57명, 부상 299명의 아픔이 있었다

필리핀 참전비를 오르는 계단이다

필리핀 참전기념비 상단에는

필리핀 고유의 민속문화를 표현하였다

고양동에는

김홍집묘

김주신묘

최영장군묘

성령대군묘

이성군의 묘가 있다

이분들은 어떤 분일까 궁금하지 않는가

살펴보자

성령대군은 누구인가

조선조 3대 임금인 태종의

4번째 아들이란다

어머니는 원경왕후 민씨이고

 일찍이 성령군에 봉해졌단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태도가 단정하여 왕의 총애를 받았단다

하지만 14세에 홍역을 앓고 사망했단다

태종은 몹시 슬퍼하여 그의 묘앞에 대자암을 세워

그의 명복을 빌게 했단다

김주신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숙종의 장인이다

숙종 28년에 순안현령으로

딸이 숙종의 계비 인원왕후가 되자

돈녕부도정이 되고

이어 영돈령부사에 이르러

경은 부원군이 되었다

 

김홍집은

1880년 예조참의로 있던 시기에

제2차 수신사로 임명되어

58명의 사절단을 이끌고 일본을 다녀왔다

1개월동안 머물면서

일본의 근대화된 모습을 두루 살피고

돌아와서는 개화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개화정책을 추진한 공로로 예조참판으로 올랐으나

수구파의 반발로 사직하였고

구미열강의 통상요구와

임오군란의 사후 처리 등을 위해 재기용되었다

 

그는 일본과의 제물포조약에 앞장서는 등

구미 각국과 수호조약 체결에 능력을 발휘했다

 

그가 총리에 오른 것은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난 후다

일본은 청일전쟁 직전에 경복궁을 장악하고

제1차 김홍집내각을 출범시켜 갑오개혁을 단행했다

 

이어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제2차 김홍집내각을 출범시켜

홍법 14조를 발표했다

 

1895년 을미사변 후에는

제3차 김홍집내각을 구성하였는데

단발령 등 급격한 개혁을 시행하다가

백성들의 거센 반발을 사게 되었고

친러 세력의 주도로

아관파천이 단행되면서

친러파 세상이 되자

하루아침에 친일파 역적이 돼 버렸다

 

고종이 머물고 있던 정동 러시아공사관으로

향하는 김홍집에게

일본군이 사인교를 가로막으며

대감 !

지금 군중들이 대감을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우리와 같이 얼른 이곳을 피하셔야 합니다 라고 말하자

일국의 총리로서

동족의 손에 죽는 것은 천명이요

구차하게 남의 나라 군인의 도움으로

살아 남고 싶은 생각은 없오 라고 하며

가던 길로 가게 되고

결국 광화문에서 몽둥이를 들고 있는 백성들에게

맞아 죽고 말았다

 

 

 

이성군은

조선 제9대 임금인 성종의

9째 아들로서

그림에 뛰어났으며

선왕의 초상화를 그릴 때에

이를 주관했다고 한다

최영장군의 묘가

2.1km란다

도로를 따라 쭉 이어진 길을 따라

걸어간다

하천에는 풀이 무성하게 자라있다

여름에 무성하게 보일 풀들을 보니

만약 큰 물이 온다면

어찌 될까

생각이 든다

한길농장을 지나고

계속 길을 따라 가는데

잘가는 것인지

걱정도 든다

대자교를 지나

걸어간다

무슨 표시라도 있어야 할 텐데

카메라를 확대하여 찍어보니

간촌방향으로 최영장군 묘가

표기되어 있다

해인사 미타원이라

불교에서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 중 하나가

고인을 모시는 것인 것 같다

해인사 미타원도

고인을 모시는 곳이겠지

나무에 최영장군 묘소로 가는

방향이 표기되어 있다

연산군 금표비와

최영장군 묘소가 방향이 같다

 

연산군 금표비가 무엇일까

 연산군은 서울 주변 지역을 왕의 사냥터, 유흥지로 지정하면서

일반인의 출입을 금지하는 금표비를 세웠단다

현재 대자동 고읍마을에 있단다

 

연산군은 성종의 맏아들로 폐비 윤씨의 아들이다

1498년 훈구파(勳舊派)

이극돈(李克墩) ·유자광(柳子光) 등의 계략에 빠져

사초(史草)를 문제삼아

김종직(金宗直) 등 많은 신진 사류(士類)를 죽이는

최초의 사화인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났다 

 

무오사화는 《성종실록》 편찬 때 그 사초 중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문제삼아 

이에 관련되었던 사림파들이 대거 피해가 일어난 일이다

 

1504년에는 생모인 폐비윤씨가

성종의 후궁인 정씨(鄭氏) ·엄씨(嚴氏)의 모함으로 내쫓겨

사사(賜死)되었다고 해서

자기 손으로 두 후궁을 죽여

산야에 버리는 포악한 성정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또한 조모 인수대비(仁粹大妃)를 구타하여 죽게 하고,

윤씨의 폐비에 찬성하였다 하여

윤필상(尹弼商) ·김굉필(金宏弼) 등 수십 명을 살해하고,

이미 죽은 한명회(韓明澮) 등을 부관참시(剖棺斬屍)하였다[甲子士禍].

 

또 그의 난행을 비방한 투서가 언문으로 쓰여지자,

한글 교습을 중단시키고

언문구결(諺文口訣)을 모조리 거두어 불태웠다.

 

한편, 각도에 채홍사(採紅使) ·채청사(採靑使) 등을 파견해서

미녀와 양마(良馬)를 구해오게 하고,

성균관의 학생들을 몰아내고

그곳을 놀이터로 삼는 등 황음(荒淫)에 빠졌다.

경연(經筵)을 없애 학문을 마다하였고,

사간원(司諫院)을 폐지해서 언로(言路)를 막는 등

그 비정(秕政)은 극에 달하였다.

 

급기야 1506(중종 1)

성희안(成希顔), 박원종(朴元宗), 유순정(柳順汀) 등의

중종반정에 의해 폐왕이 되어

교동(喬桐:江華)으로 쫓겨나고,

연산군으로 강봉(降封)되어 그해에 병으로 죽었다.

 

그의 치세는 개국 100년의 조선조에 한 시대의 획을 긋게 하여,

이후 50년은 사화(士禍)라는 유혈극이 잇따라 일어나

그것은 선조 이후 다시 붕당(朋黨) 및 붕당정치로 확대 악화되고,

한편으로는 임진 ·병자 등 국난으로 국운은 쇠퇴의 길을 밟게 되었다.

 

출처 : 한국의 산천 블로그

간촌 방향 최영장군 표시에 따라

걸음을 옮긴다

최영장군묘까지는

1.21km이다

성령대군묘는

1km이니

거의 붙어 있나보다

고양동과

필리핀 참전비와

최영장군 묘의 갈림길에서

잠시 주위를 바라본다

최영장군  묘지 표시가

여러가지로 표기되어 있다

눈이 소복이 쌓여 있으며

얼음이 얼지 않아 있으니

걷기에 힘이 들지 않는다

 

또한 곳곳에 알림판도 있으니

길을 잃을 염려도 없고...

인도에는 나무들이 길게 늘어서 있어

걷는 이를 반긴다

성령대군묘가

0.5km란다

헌데 최영장군 묘는

1km이고

100m 차이라고 적혀 있었는데...

최영장군 묘지를 향해 걷는다

500m 밖에 남지 않았다

 

인도에는

사람 한명이 걸을만한 넓이로

눈이 녹아 있다

논을 바라본다

벼들이 심어져 있었을 줄이

그대로 남아 있다

최영장군과 성령대군의 거리가

얼마인지

표지판마다 틀리다

마을을 거쳐

쭉 걸어간다

마을에는 목련이 몽우리져 있다

최영장군 묘지가 600m 남아 있단다

계단이 보인다

계단을 올라선다

게단을 올라서니

나무들이 우람하다

또한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아서 인지

눈길이 얼지 않았다

최영장군묘가 0.51km란다

고양동 누리길의 현재 위치가 빨간 글씨로 씌여 있다

최영 장군의 묘지가 위치한 곳의 산이름이

대자산이란다

벽제관지에 대한 소개가 있다

벽제관지는 조선시대 역관터로서

중국을 오가던 고관들이 머물렀던 곳이란다

조선시대에는

한양에서 중국으로 통하던 관서로서

한양에 들어가기 하루 전에

이곳 벽제관에서 숙박하고

다음 날 예의를 갖추어 들어가는 것이 관례란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중국으로 가는 사신들도

이곳에서 머물렀다 한다

 

벽제관은 임진왜란 시

평양성을 탈환한 조명 연합군이 서울로 내려오던 중

미리 매복하고 있던 일본군에게

대패한 곳이기도 하다

 

이 벽제관 전투에서 패한 명나라 군은

전투에 적극성을 발휘하지 않게 되고

하여 임진왜란은 이후부터

장기전으로 향하게 되고...

대자산 숲길은 최영장군의 묘소에서

고양동 고양향교까지 이어진

숲속 숲길이다

 

총길이는 약 2.5km이며

오솔길, 펑지길, 산길로 이루어져 있으며

정상부에 해발 210m의 대자산이 있어

대자산 숲길로 불리고 있다

 

나무 사이로는 북한산 주봉이 보인단다

최영장군 묘소로 가는 길이다

눈길에 덮여 있어

겨울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최영장군 묘소까지

210m가 남아 있다

고양동 누리길이라고

나무에 붙여 놓았다

최영장군묘가 30m 밖에 남지 남았다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

어렸을 적 노래를 불렀던 생각이 납니다

 

고려말 최후의 명장 최영장군이

평생 실천했던 말이랍니다

 

안팎으로 혼란 스럽던 원나라, 명나라 교체기에

밖으로 외적을 물리치고

안으로 고려 왕실을 지키려 했던

명장이자 재상이었답니다

 

중국이 혼란한 틈을 타 요동정벌을 꾀하였는데

이때 출병한 이성계가

4대 불가론을 내세워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귀양을 가게 되고

참수되게 되죠

 

드디어 계단을 따라 올라가게 됩니다

계단을 올라가기 전

비각을 바라봅니다

최영은 공민왕 때 조일신의 난을 평정한 이후

100여차례의 전투에서 승리했답니다

홍건적과 왜구를 상대로 말이죠

 

특히 공민왕 5년에는

공민왕의 반원정책을 도와

압록강 서쪽을 수복하죠

 

또한 8도 도통사로 요동정벌을 꾀하였으나

이성계가 4대 불가론으로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귀향을 하게 되고

끝내는 처형을 당하게 되죠

 

그리고 이성계는

역성혁명을 일으켜

고려를 멸하고

조선을 세우게 되죠

 

역사에서 가정은 없다지만

만약 최영이 요동정벌을 꾀하지 않았다면

고려가 망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다른 방법으로

이성계 등 신진세력이

나라를 멸하였을까

생각해 봅니다

계단으로 쭉 이어져 있습니다

천천히 최영장군을

포은 정몽주를

목은 이색을

야은 길재를

두문동 학자들을 생각합니다

눈이 녹아 있는 곳은

걷기에 위험하진 않으나

눈이 쌓여 있는 곳은

조심해서 걸어갑니다

눈이 얼어 있어

조심해서 올라갑니다

이곳은 녹아있어

편안히 걸어갑니다

드디어 최영장군 묘소에 왔습니다

돌 무덤이 쌓여 있네요

황금 보기를 돌 같이 하라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누가 돌을 가져 왔을까요

이심전심이었나요

 

황금보기를 돌 같이 하라

이는 최영이 남긴 말로 유명합니다

원래 이말은 최영의 아버지가

죽으면서 남긴 유언이었다고 합니다

 

원래 성품이 강직하고 올 곧었던 최영은

아버지의 말에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아

이 글귀를 써서 곁에 두고

항상 되뇌었다 합니다

 

하여 높은 직에 있을 때에도

별다른 청탁이나 뇌물 사건에 휩쓸리지 않았고

온 나라의 백성으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며

그러하기 때문에

이성계는 최영을 죽일 수 밖에 없었다는...

최영장군묘는

경기도 기념물 23호란다

 

유배지에서 개경으로 돌아온 최영에게

무리하게 요동을 정벌하려고 계획하고

왕의 말을 우습게 여기고

 권세를 탐한 죄를 들어

참형에 처하려 하자

 

평생에 있어서 탐욕이 있었다면

자신의 무덤에 풀이 자랄 것이고

결백하다면

무덤에 풀이 자라지 않을 것이라는...

 

그리고 실제로 오랜 세월동안

무덤에는 풀이 자라나지 않았답니다

문인석이 한쌍 있으며

비석에는 글씨가 적혀 있다

 

최영은 고려가 멸망한 후

민간의 무속신앙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으니...

무속에서는 최영장군은 수명장수

안과 태평의 신으로

무에서 가장 많이 모셔지는 신령가운데

하나가 되었단다

 

외적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한

최영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백성들은 최영을 최고의 장군신으로

만들었으니...

 

글의 출처 : 아리랑 블로그님

왼쪽에 있는 문인석과 비석을

찍은 모습이다

오른쪽에 있는 문인석과

비석을 찍은 모습이다

무민공 충혼비란다

위쪽에는 최영장군의

아버지 무덤이 있다

아버지 무덤에서 바라본

최영장군 묘의 모습이다

 

최영에 대하여 생각해본다

공민왕 시절

조일신은

공민왕이 원나라에서 불모로 잡혀 있던 시절

공민왕을 시종했던 공을 들어

방자함이 극에 다달았고

왕권을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자

권세를 누리던 조일신을 제거하게 되어

나라를 지키는 호군으로 출세하게 된다

 

이후 최영은 원나라의 원군 요청에 따라 중국으로 출정하여

중국의 상황을 파악하고 돌아오기도 한다

이후 공민왕의 뜻을 받든 최영은

유인우의 휘하에서

원나라와 맞서 싸워

100년간이나 빼앗겼던

함경도 일대 쌍성총관부를 되찾게 된다

 

이 과정에서

이자춘과 그의 아들 이성계를 만나게 된다

 

최영은 이성계와 함께

북으로는 홍건적을

남으로는 왜구를 막아내며

고려를 외침으로부터 지켜내는 대표적인 장군이 된다

 

왜구는 약 40년간 한반도의 해안을 끈질기게 괴롭혔으며

최영은 삼남지역에 창궐하는 왜구를 격파하여

백수 최만호라는 별명을 얻으며

왜구들의 공포의 대상으로 되었다

 

북으로는 홍건적의 침략에 맞서

이방실 등의 홍건적을 물리쳤고

1361년에는 개경까지 점령한 홍건적을 격파하여

나라를 위기에서 구출하였다

 

홍건적은 머리에 붉은 수건을 두룬

농민반란세력이었다

 

최영은 나라 내부에서 일어난 반란에도

진가를 발휘했다

공민왕을 시역하려 한 김용의 흥왕사 변을 진압하고

공민왕의 반항에 위기를 느낀

원나라의 군사를 섬멸하였다

 

공민왕이 죽은 후에는

우왕을 도왔으며

문하시중의 자리에 까지 올랐다

 

당시 중국은 원나라, 명나라 교체기에 있었는데

명나라가 원나라를 몰아내고

이웃나라를 돌아보게 되는 여유를 갖게 되는데...

 

그중 하나로

명나라는 공민왕이 회복한 철령 이북의 땅을

다시 반납하라는 억지를 부렸다

 

이전 원나라의 땅은 모두 명나라의 땅이라고

하여 쌍성총관부에는 철령위를 세우면서...

 

철령 이북의 땅을 수복할 때

전투를 치룬 경험도 있었던 최영은

명나라의 말도 안되는 요구에 반발했다

 

최영은 명나라가 아직은 내정의 불안정으로

전쟁에 전력을 다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요동까지 쳐들어가자는 주장을 편다

 

하지만 이성계는 최영의 주장에 반대하고...

군사를 움직이기 어려운 여름이고

북방으로 병력을 이동하여 왜구가 들꿇을 것에 대한 우려

소국이 대국을 칠 수 없다는...

 

최영의 보호를 받고 있는 우왕은 최영의 손을 들어 주었지만

최영이 자신의 곁을 떠나는 것은 원치 않게 되고...

그러나 이성계에게 군대를 내어준 것은

고양이에게 생선을 내준 것이나 마찬가지

이성계는 회군하고자 고려 조정에 아뢰었으나

허락하지 않자

왕명을 거역하고 군대를 회군시키고...

 

돌연한 사태 변화에

대부분의 군대가 요동정벌군에 있었으므로

최영은 고봉헌으로 유배되고

합포로 옮겨 졌다가

결국 개경으로 다시 압송되어 참형되고...

 

최영 사후 4년 후에

이성계는 조선을 개창하고

 

또 4년이 흐른 후에

이성계는 무민이라는 시호를 내린다

 

다음 2부에서는

최영묘소에서 고양 향교까지를

 

3부에서는

중남미문화원에서

벽제관지

선유랑 체험마을

안장고개까지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식사동 주민센터 길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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