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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처럼 살고싶다. 월산대군 묘(1488)

고양시청 2012. 3. 6. 09:10

바람처럼 살고싶다. 월산대군 묘(1488)

 

지 정 번 호 : 향토문화재 제1호

소 재 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신원동 산16-35

 

월산대군(月山大君)의 묘는 신원동 능골에 자리잡고 있으며 뒤에 부인 순천 박씨의 봉분을 두었습니다. 월산대군의 큼직한 봉분 앞에는 묘비와 상석, 문인석, 망주석, 장명등과 신도비 등의 석조물이 배치되어 조선 시대 묘제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상석 뒷편의 묘비는 운문이 조각된 비두와 장방형의 대석을 갖추었고, 규모는 높이 180cm, 폭 74cm, 두께 32cm입니다. 상석은 3매의 장판석을 놓았는데 정면 270cm, 측면 155cm의 규모입니다.

 

월산대군의 묘는 석마, 석양, 석호 등이 없을 뿐이지 흡사 왕릉처럼 듬직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는 성종이 친형인 월산대군을 극진히 아꼈음을 보여줌과 동시에 풍족했던 당시의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월산대군 묘의 앞으로는 묘갈과 상석, 장명등이 굳건히 서있고 커다란 망주석과 석인이 그 양쪽을 지키고 있어요. 모두 묘소 조성 당시의 유물 그대로입니다. 묘소의 뒤쪽으로는 월산대군의 부인인 승평부부인 박씨의 묘소가 있는데, 연산군의 큰어머니이며, 어머니를 일찍 보낸 연산군에게 실질적인 어머니 역할을 한 여인입니다. 하지만 연산군이 그녀를 너무 따랐던 나머지 인수대비에게 연산군과 통정을 했다는 혐의를 받고 사사를 당하는 비운의 여인이죠.

 

월산 대군 신도비는 신원동 능골 마을에 자리잡고 있는 월산 대군과 박씨 부인 묘소 앞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성종 20년(1489) 왕명에 의해 세워진 이 비는 크게 대좌, 비신, 이수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대좌에는 비신을 꽂을 수 있도록 비좌가 만들어져 있고 연꽃무늬가 돌아가며 새겨져 있습니다. 비신의 비문은 풍우로 인한 마모로 심하게 훼손되어 있어 판독이 어려운 상태입니다. 또한 비신의 윗부분에는 ‘☽山大君碑銘’이란 전자(篆字)가 새겨져 있는데 달과 산을 표현한 전자가 매우 흥미롭습니다. 비신의 높이는 218cm, 폭 105cm, 두께 32cm의 규모이고 비문은 임사홍(任士洪)이 짓고 썼으며, 전액도 함께 썼습니다. 비신과 연결된 이수에는 매우 화려하게 용 조각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앞면에는 좌측의 아랫부분 용이 위를 올려다보고 있고, 우측 윗부분의 용은 아랫부분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이 두 마리의 용 주변에는 구름무늬가 세밀하게 조각되어 있습니다. 비문은 임사홍(任士洪)이 짓고 썼으며, 전액도 함께 썼습니다. 임사홍은 1466년에 과거에 급제하였고 1506년에 처형당한 인물인데, 조선시대 대표적인 간신으로 이름이 높은 인물이죠.

 

월산대군은 누구일까요?

월산대군 이정(李婷)은 1454년에 태어나 35세의 한창 나이에 사망(1488년)한 왕족입니다. 추존왕 덕종의 장남이며 성종(9대)의 친형으로 자는 자미(子美)이며 호는 풍월정(風月亭)입니다. 세종(4대)이 증조부되시며, 세조(7대)가 조부가 되시지요. 혈통으로 보자면 왕좌에 오르고도 남음이 있으실 분입니다.

 

왜 王이 아닌 大君인가?

하지만 이정은 왕이 되지 못하셨습니다. 장자이며 나이도 왕좌를 이어가기에 적당하였던 그는 왜 왕위를 받지 못하였을까요?

그는 7세 때인 1460년(세조6년) 월산군에 봉해졌고, 1468년(예종 즉위) 동생인 자을산군(후에 성종이 됨)과 함께 현록대부(顯祿大夫)에 임명되었습니다. 예종은 즉위한 다음해에 사망하였고 왕위는 예종의 아들인 제안대군, 덕종(예종의 형)의 아들인 월산군과 자을산군 중 한명으로 압축되었죠. 이에 세조비인 정희왕후는 세조의 명을 받들어 제안대군은 너무 어리고 월산군은 건강이 좋지 않으니 됨됨이가 빼어난 자을산군에게 왕위를 이어가게 하였고 예종이 사망한 바로 다음날 즉위식은 거행되었습니다. 굉장히 서두른 감이 있지요.

역사가들은 자을산군의 왕위계승이 다른 이유에 의해서 성공했다고 말합니다. 월산대군의 건강이 나쁘다는 근거가 남아있지 않고, 자을산군 역시 제안대군처럼 어렸기 때문(13세)입니다. 나이도 어리고 장자도 아닌 자을산군이 왕위에 오른 것은 그의 장인이 한명회였기 때문입니다. 한명회는 신숙주 등과 함께 당시 최고의 권력자였고, 성종을 즉위시킴으로서 명실상부한 최고의 권력을 누리게 되었지요.

왕이 되지 못한 제안대군과 월산대군은 이제 역적으로 몰릴 상황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왕이 되지 못한 왕세자가 억울한 죽음을 당하는 일은 역사 속에서 수없이 등장하지요. 하지만 두 남자는 결코 미련하지 않았습니다. 제안대군은 정말 바보처럼 행동해서 역모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월산대군은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는 풍류객처럼 보여서 일생을 유유자적하게 보낼 수 있었습니다. 풍월정이라는 그의 호에서 그의 인생이 묻어나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 아닐까요.

 

월산대군의 生

월산대군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자연 속에 은둔하며 여생을 보내야 했습니다. 현재의 덕수궁에 자신의 집을 짓고 고양땅에 별장을 지어 자연과 덧없는 인생을 노래했습니다. 그는 일찍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경사자집(經史子集)을 두루 섭렵하였다고 합니다. 그의 성품은 침착, 결백하고, 술을 즐기며 산수를 좋아하였으며, 부드럽고 율격이 높은 문장을 많이 지었다고 하는데, 그의 시문 여러 편이 「속동문선(續東文選-1518년)」에 실릴 정도로 수준이 높았습니다. 또 「풍월정집(風月亭集)」이라는 저서도 있는데 이 책은 중국에도 널리 알려졌다고 해요.

그렇게 인생을 보내던 그는 어머니인 인수왕후의 신병을 극진히 간호하다가 병들어 35세로 사망하였습니다.

그럼 월산대군 신도비의 내용을 보면서 그의 생애에 대해 자세히 살펴볼까요?

 

오직 하늘만이 조화(造化)를 맡아、선악(善惡)을 분별하는 것。

이미 덕(德)을 주었다면、마땅히 수명(壽命)도 주었어야 했다。

때로는 덕(德)과 수(壽)가 일치하지 않으니、그 이치 또한 알기가 어렵구나。

이 나라가 개국(開國)한 이래、성자(聖子)와 신손(神孫)이 계승하였다。

훌륭한 공족(公族:왕족)은、많고도 끊어지지 않았으나

그 누가 대군처럼、재주와 덕을 겸비하였더란 말인가?

진실로 대군답도다! 몸가짐이 높고 높아、

밖으로는 사치스런 것을 버리고、경적(經籍)만을 읽었도다。

제자백가(諸子百家)를 다 읽고、박약(博約)으로 귀결하였고

사화(司華:문장(文章))를 때로 지으면、옥을 꿰고 구슬을 이은 듯。

큰 솜씨라도 곁에서 보면、손이 굳어지고 한숨만 쉬게 되니

뛰어난 묘구(妙句)는、『한도십영(漢都十詠)』일 것이다。

임금께서 공에게만 글을 지어주었는데

우리 신하(臣下)들에게도 화답을 지으라 하시니、형제의 우애를 생각함이다。

우애(友愛)는 말에 나타나고、문장을 가지고 즐기며

은혜와 대우(待遇)가 이미 두터워、힘으로 어기지 못할까 봐 두렵구나。

마음에는 외경(畏敬)을 간직하고、밖으로는 교만과 자랑을 끊어

밝고 밝은 아름다운 소문(令聞)、온 조정(朝廷)에 퍼졌도다。

깨끗한 의표(儀表)는、옥호(玉壺:옥으로 만든 병)에 얼음을 담은 듯、

돌아보니 봄바람 불어와、온화한 기울을 움킬 수가 있구나。

뉘라서 좋아하지 않으리오、중국 사신[華使]도 감복(感服)하였도다。

벼슬에 나아가 일을 맡는 것을、세상에선 영화(榮華)로 여겼으나、

공은 그렇지 않아、진심으로 사양하였으니

덕(德)을 겸한 아름다움은、역사에 빛나리라。

아침마다 문안드리기를、추우나 더우나 그만두지 않았고

한 걸음 한 발자국도、법도(法度)를 따라 움직였다。

아름다운 태도와 곧은 행실은、고금에 우뚝하다。

동평왕(東平王)의 착함과、한간헌왕(河間憲王)의 어짐은、

한실(漢室:한(漢)나라)에 이름 높아、뉘 감리 비기랴。

천년 뒤 우리 동방에、다시 이런 분이 계셨도다。

우리 임금 신성하여、효(孝)로써 다스렸다。

진심으로 우애하여 체화(棣華:형제간의 우애)는 더욱 빛나는구나。

홀연히 돌아가시니、이 누구가 시킨 것이냐?

성스런 정(聖情)은 끝이 없는데、어찌하여 하늘로 가셨단 말인가!

오직 은전을 생각하여 구천(九泉:저승)에서나 위로코저。

이에 대신에게 명하여、친천(親阡:묘자리)을 잡게 하였도다。

저 친천은 어디메뇨? 고양(高陽)의 북쪽이다。

풀은 무성하고 나무는 빽빽한데、

산 돌고 물 휘감으니、유택(幽宅)을 두는 것이 마땅하도다。

전에는 들판이었는데、이제는 현궁(玄宮:유택)이 되었으니。

혹 미리 알았더란 말인가! 마음이 하늘과 통합하였나 보다。

영원토록 평안하소서、마렵(馬鬣:무덤)도 높다랗구나。

왕명으로 비(碑)를 세우니、이수(螭首)도 빛나는구나。

살아 영광 죽어 슬픔、천만 년토록 아름다움 전하게 될 것을。

나의 글은 볼품없어、어떻게 공의 덕(德)을 명(銘)할 건가?

 

홍치 2년 기유년(1489) 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