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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공장에서 감사패를 드려야할 분이셨다고. 민순 선생 묘(1591, 큐레이터와 떠나는 문화유산답사 - 고양시 편)

 

지 정 번 호 : 향토문화재 제8호

소 재 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현천동 산33-2

 

민순(習靜) 선생 묘는 현천동 거무내 마을에 위치하고 있으며 배(配) 숙인 평양 조씨(淑人平壤趙氏)와 숙인 전주 이씨(淑人全州李氏)가 함께 3기(基)의 봉분이 나란히 자리 잡고 있습니다. 민순의 봉분 앞에는 ‘통훈대부통례원 우통례 습정선생 민공지묘(通訓大夫通禮院右通禮習靜先生閔公之墓)’라고 쓰여진 묘비가 있으며 우측에 오석(烏石)의 묘표(墓表)가 1983년 9월 18일 종중(宗中)에 의해 건립되었습니다.

묘 앞에는 석물로 망주석, 상석, 향로석이 갖추어져 있습니다. 묘소에서 50m 아래에 있는 비의 비문은 문인(門人) 홍가신(洪可臣)이 짓고 글씨는 김현성(金玄成)이 썼으며 전자(篆字)는 노직(盧稷)이 썼습니다. 흰 대리석으로 된 이 비의 규모는 높이가 220cm, 폭80cm, 두께 25cm입니다.

묘갈명(墓碣銘)에는 ‘습정선생 민공묘갈명(習靜先生閔公墓碣銘)’이라는 전자(篆字)만 확인될 뿐 비문은 판독하기 어려울 정도로 마멸이 심합니다.

민순은 조선 중기의 학자로 문봉서원(文峰書院)에 제향된 고양팔현(高陽八賢)의 한 사람입니다. 중종 14년(1519)에 출생하여 선조 24년(1591)에 돌아가셨습니다. 자는 경초(景初), 호는 행촌(杏村), 또는 습정(習靜)으로 본관은 여흥(驪興)입니다. 처음에는 낙봉 신광한(申光漢)에게 글을 배운 뒤 화담 서경덕을 찾아가 그의 문인(門人)이 되었습니다. 향시(鄕試)에 장원을 하였으며 선조 초 효행으로 조정에 알려져 효릉 참봉(孝陵參奉)으로 발탁되었습니다. 그 뒤 전생서주부(典牲署主簿)로 특진되고 형조․공조의 좌랑(佐郞)을 거쳐 토산현감(兎山縣監)으로 있다가 사직하였습니다. 그러나 곧 조정의 부름으로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이 되었습니다. 이 때 마침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상례(喪禮)가 있었는데 예관(禮官)들이 오모흑대(烏帽黑帶)로 상복을 정하자 상소하여 송나라 효종의 백모삼년(白帽三年)의 제도를 준수하도록 건의하여 실시케 했으며 그 뒤 용강현령(龍岡懸令), 청풍군수(淸風郡守)로 외직을 받은 후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을 역임하고 수안군수(遂安郡守)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고 그 덕망을 내외에 떨쳤다고 합니다. 그 뒤 공조정랑(工曹正郞), 예빈시정(禮賓寺正), 통례원 예통(通禮院禮通) 등에 임명 되었으나 학문에 정진할 수 없다하여 모두 사퇴하고 향리에서 후진 교육과 학문 연구에만 전심하였습니다. 특히 어버이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장사랑공(將仕郞公)이 창병(瘡病)을 앓자 밤낮으로 간호하며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상을 당하여 예를 준수하므로 보는 이마다 감동하여 시복(試服)하였다고 합니다. 75세를 일기로 행주리(杏州里) 자택에서 돌아갔으며 개성의 화곡서원(花谷書院)과 고양(高陽) 문봉서원(文峯書院)에 제향되었습니다. 저서로는 [행촌집(杏村集)]이 있습니다.

 

지명유래

현천(玄川)이란 지명은 이 마을에 살던 행촌 민순 선생이 가난하여 나뭇잎에 글씨 연습을 하곤 하였는데, 그 연습분량이 워낙 많아 봄에 눈이 녹을 때나 여름철 장마 때면 마을 개울이 검게 물들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현천은 우리말로 검은 내로 부르다가 쉬운 발음으로 가무네, 가무내, 거무내 등으로 변화하였으며 먹물이 흐르는 골짜기라 하여 먹골이라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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