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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면 임진왜란은 없었을 수도. 황윤길 묘(1592, 큐레이터와 떠나는 문화유산답사 - 고양시 편)

 

지 정 번 호 : 향토문화재 제55호

소 재 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지축동 72-15

 

황윤길(黃允吉, 1536~1592) 묘는 은평뉴타운의 서쪽 군부대 내에 위치합니다. 지금은 일반인들이 쉽게 들어갈 수 없는 곳이지만 원래 이곳은 장수황씨의 선산이었답니다.

황윤길은 1592년에 사망하였는데, 당시가 임진왜란 때였습니다. 워낙 세상이 뒤숭숭하던 때라 묘의(墓儀)를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상석(床石)과 문인석(文人石), 묘갈(墓碣)만을 설치하였으나 묘갈은 도난당했습니다. 봉분(封墳)과 문인석, 상석이 남아있는데, 석물로 보자면 정말 훌륭한 묘소가 많은 고양시에서 그리 대단한 편은 아닙니다. 그런데 왜 이 무덤이 향토문화재로 지정된 것일까요? 그 이유는 바로 이 무덤에 남아있는 역사성 때문입니다. 한번 살펴볼까요?

황윤길은 임진왜란 직전인 1590년(宣祖23年) 통신사 정사(通信使 正使)로 일본에 파견되어 적정을 면밀히 파악하고 다음해 귀국하여 일본의 침략이 임박하였음을 보고하고 시급히 대비책을 강구할 것을 건의하였습니다. 하지만 부사(副使)로 갔던 김성일(金誠一)은 유독 이를 부인하고 결코 침략이 없을 것이라고 장담하며 황윤길(黃允吉)의 언동은 국민을 불안하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지요. 당시 집권세력인 유성룡(柳成龍)등은 김성일(金誠一)의 의견을 채택하고 황윤길을 내친 채 대비를 등한히 하였습니다.

황윤길과 김성일은 일본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조선에서 보낸 통신사로서 함께 일본에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의 의견은 완전히 틀렸던 것이지요. 왜 그랬을까요? 그 이유를 한번 생각해보겠습니다.

당시 조선의 조정은 동인(東人)세력이 정권을 잡고 있었습니다. 요즘으로 치자면 여당이었죠. 게다가 핵심인물인 유성용과 김성일은 퇴계의 수재자들로서 막역한 사이였습니다. 유성용이 김성일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것은 당시의 정황으로 봤을 때 어쩌면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지요. 하지만 유성용도 일본이 침략하지 못할 것이라는 김성일의 의견에 의구심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김성일에게 다음과 같이 물어보았지요.

 

“그대가 황윤길의 말과 고의로 다르게 말하는데, 후일 병화가 있다면 어떻게 하려고 하느냐?"

김성일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도 어찌 왜적이 침입하지 않을 것이라 단정하겠습니까? 다만, 온 나라가 불안에 휩싸일까봐 그런 것입니다."

 

사실 왜가 조선을 침략할 것이라는 소문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훨씬 전부터 있어 왔습니다. 당시 일본은 피비린내나는 전국시대를 마치고 막 통일된 시기였습니다. 오랜 전쟁으로 잘 훈련된 군사들은 쿠테타로 일본을 통일한‘도요토미 히데요시’막부를 공격할 수 있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었죠. 머리가 좋았던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그들의 눈을 조선으로 돌리게 합니다. 조선을 함께 정복하자는 꿈을 심어준 것이죠. 더불어 그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기도 하고 말입니다. 율곡 이이는 이를 염려하여 ‘10만 양병설’을 주장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이 역시 야당인 서인세력이었지요. 황윤길의 의견과 마찬가지로 조정은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결국 여당이었던 동인세력은 일본이 침략할 것이라는 서인(西人)세력 황윤길의 의견을 거부하게 됩니다. 일본이 침략할 수도 있지만 자신들이 정권을 잡고 있던 조선의 동요가 싫었겠지요. 운이 좋다면 일본이 침략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말입니다. 사실 동인세력에서 주장한 바와 같이 동요가 일어나지 않도록 정비하고 전쟁을 준비했다면 임진왜란의 피해를 줄일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았을 때, 제대로 전쟁준비를 하지 않았고 결국 조선은 엄청난 피해를 입고 말았죠.

조선은 다음해인 1592년 왜적의 대거 침략에 속수무책이 되어 부산상륙 20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그 후 7년간 전국이 왜적에게 유린되어 나라가 초토화되는 임진정유왜란(壬辰丁酉倭亂)의 참화를 겪게 되었습니다. 당장의 이해득실에 눈이 어두워 불과 1년 뒤의 참상을 보지 못한 것이죠.

선조대왕은 전년 일을 후회하고 황윤길을 병조판서를 특배하였습니다. 그러나 부임치 못하고 별세하여 당질 황즙(黃葺)은 그를 선산(현재의 묘소)에 안장하고 충청도 비인으로 피난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황윤길은 유비무환(有備無患)의 교훈에 인용되는 인물이 되었으며 현재 인접 육군교육사단에서 이 묘소를 정훈교육장의 하나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흐르는 역사는 되돌릴 수 없다고 하지만 임진왜란을 막을 수 있었던 기회가 여러 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피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임진왜란의 엄청난 피해를 생각한다면 정말 분통이 터지는 일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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