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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편 왜 행주산성에서 싸웠을까


고양시청 학예연구사 심준용

4. 왜 행주산성에서 싸웠을까

권율은 자신의 사명이 근왕군(勤王軍)으로서의 역할에 있다고 판단했으며 당시 근왕군의 역할은 하루라도 빨리 수도를 일본군으로부터 수복시키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1593년 1월 27일 조명 연합군의 벽제관 전투 패배로 도성 수복작전은 실행 될 수 없었습니다. 패전의 충격으로 명군의 주력은 임진강 후방인 개경으로 후퇴해서 지원군의 도착을 기다린다는 핑계로 일본군 공격을 일단 보류하고 있었던 실정이었습니다. 권율은 조방장(助防將) 조경(趙儆)을 보내 한성의 서쪽지구에 진출해서 주둔할 진지를 정탐케 하였습니다. 진지로 결정된 곳이 덕양산 즉 행주산성입니다.

이즈음 이덕형이 “적들이 중국군사가 바싹 다가온 것을 알고 경성의 군사를 나누어 평양에다 더하면 경성의 적세는 반드시 외롭게 될 것입니다. 남도군을 동원해서 경성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라는 ‘경성 수복작전’을 건의하였습니다. 이에 전라도관찰사였던 권율은 독자적인 작전권을 위임받게 되었습니다.

권율은 평양전투 이전의 한성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의 실정이 추위와 식량부족, 피로에 지친 상태임을 간파하고 한성을 수복할 절호의 기회로 판단하였고 조명연합군의 한성수복작전 시에 그 일익을 맡은 공격전에 참여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권율의 원래 작전은 한성의 인후부(咽喉部)에 해당하는 안현(鞍峴)(현재 아현동 근처)을 거점으로 삼아 일본군을 기습공격한다는 것이었는데, 안현을 선정한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연합군의 대군이 남하하기 때문에 한성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은 공격작전을 염두에 두지 못하고 오직 방어에만 전력을 다할 것이다.

둘째로 안현은 한성과 가까워 방어작전에서 공격작전으로 쉽게 전환할 수 있어서 공격작전상의 시간을 절약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로 안현작전의 수행은 일본군의 중심부에 대한 접근으로 적에게 패배 위기의식을 고조시키고, 나아가 공격시 적들을 경악시키는 충격 효과를 극대화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작전 구상이 구체화되는 시기 동안에 전황의 변화가 발생하였습니다. 일본군은 평양전 패배이후로 한성 주둔군이 크게 증가되었으며 벽제관전의 승리로 일본군의 사기가 한껏 올라간 것입니다. 상황 변화로 인하여 처음에 주장했던 ‘안현안’은 일본군의 적극적인 포위작전 시에는 전멸당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권율은 일본군을 20리 밖으로 끌어내서 능동적인 작전을 구사할 수 있는 ‘행주산성안’을 선택하였습니다.

안현에 비해 행주는 주위로부터 격리된 독성으로 후방지원은 곤란하나 한성으로부터 20리 이상 거리가 있어 일본군의 일부를 유인해서 작전할 수 있는 지형적 여건을 구비한 곳입니다. 이에 권율은 조경을 위시한 부하 제장들이 안현안을 극력 반대하자 그도 결심을 바꾸어 ‘행주산성안’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행주산성안’이 결정된 후 권율은 휘하의 장병 4천명 중에서 처영이 이끄는 승군을 포함한 정예병 2,300명을 뽑아서 행주산성으로 이동하였습니다. 행주산성으로 이동하면서 산성 인근 주민들도 의병으로 자원 참전하게 되었습니다. 나머지 병력은 전라도병사 선거이에게 주어 금주산(衿州山)에 주둔하면서 한양의 일본군을 견제토록 하였습니다.

이즈음 권율은‘한성의 적이 대병력으로 독성산성을 치려고 한다.’는 첩보를 입수하였습니다. 이에 독성산성에 소수의 군사만을 남겨놓고 되도록 의병(현대의 마네킹)을 많이 만들어 놓아 주력군이 그대로 수비하고 있는 것처럼 위장케 하였습니다. 권율은 양주일대에는 소모사(召募使) 변이중(邊以中)을 주둔시키고, 통진에는 충청도 관찰사 허욱(許頊), 강화에는 창의사 김천일(金千鎰), 한강 하구에는 경기수사 이빈(李頻)과 충청수사 정걸(丁傑)을 배치하였습니다. 그리고 파주의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양주의 경기도방어사 고언백(高彦伯) 등도 한성을 포위하는 형세를 이루고 있었으며, 이외에도 경기도 외곽지대에는 관군과 의병이 산재하고 있었습니다.

행주산성의 역사를 살펴보면 임진왜란 시기 외에도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삼국시대에는 한강유역을 차지하는 국가가 한반도의 패권을 장악했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데, 백제․고구려․신라의 전성기가 행주산성일대를 점령했던 시기였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고 한반도를 접수할 즈음에 일어난 나당전쟁(670~676년)시, 행주산성일대는 왕봉현의 치소로 추정이 되고 있는데, 많은 당병이 수장된 ‘왕봉하’는 행주산성 부근의 한강을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인근에 지형적으로 매우 유사한 고양멱절산유적(경기도 기념물 제195호)에서 한성백제시기의 유물이 다량으로 출토되는 사실은 이 일대가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음을 고고학적으로 뒷받침해주고 있습니다.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개국됨에 따라 태조 이성계는 수도를 개성에서 서울(한성)으로 이전하게 되는데, 행주산성이 있는 덕양산이 이 시기에도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로 주목받게 됩니다. 풍수지리적으로 살펴보면 서울은 내사산과 외사산으로 보호되는데, 내사산은 백악산․낙산․목멱산․인왕산이며, 외사산은 북한산․용마산․관악산․덕양산(이상 북동남서 순)으로 이루어집니다. 결론적으로 행주산성이 있는 덕양산은 풍수지리적으로 판단했을 때 서울로 침입해 들어오는 외부의 침입을 서쪽에서 1차적으로 차단하는 곳에 입지해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성계는 외사산과 내사산이 지켜주고 있는 한성에 수도를 계획하게 되는 것이죠.

행주산성의 이러한 지리적 요인은 최근에도 그 중요성을 입증하게 됩니다. 바로 우리민족의 비극인 6.25전쟁 때인데, 인천상륙작전 성공 후 수도 서울을 수복하기 위해 해병대가 행주산성으로 도강했던 것입니다. 행주산성 입구 인근에 세워진 해병대 행주도강 전첩비는 이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것입니다. 비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인천 상륙을 성공리에 감행한 한미 양국 해병대는 다시 적을 추격하여 대거 한강을 건넜으니 때는 1950년 9월 20일 미명, 곳은 권 권율 도원수의 대첩기공비가 서 있는 행주 아수라의 혈전 끝에 서울진격의 교두보는 이에 확보되었으니 이 어찌 누란과 같은 조국을 위하여 새로운 감격이 아니리오.

이 무렵에 자유의 신으로 승천한 그대들의 빛나는 공훈과 아름다운 이름은 저 한강수와 더불어 이 국토와 겨레의 마음속에 영원 무궁히 흐르리라.

삼가 비노니 안심하고 명복 할지어다.

1958년 9월 28일 해병대사령부

 

이처럼 행주산성이 있는 덕양산은 한반도의 젓줄인 한강을 지키는 군사적 요충지로 지속적으로 역할을 담당해 왔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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