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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공양왕릉 (高麗恭讓王陵)

고려의 마지막왕 공양왕무덤이 두개이다. 살아생전 순탄하지 못했던 삶은 죽어서까지도 조용하지 못했던 것이다.
무덤이 있는곳은 이성계 일파에게 쫓기다 연못에 뛰어들었다는 고양이고, 또하나의 무덤이 있는 삼척은 유배를 가서 살해 당했다는 곳이다. 1416년 조선 태종 16년 능을 고양현에 마련하고 경기도 안성 청룡사에 안치되어 있던 왕의 어진을 능 옆의 암자로 가져오게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사후 1394년 유배지 삼척에 묘를 조성한 뒤 12년이 지나 그가 묻히기를 원했던 고양으로 이장되었을 가능성이 있단다.

그렇게 삼척에서 고양으로 능을 이전한데는 고려의 마지막 왕에 대한 대접을 함으로써 역성혁명에 따른 민심의 동요를 의식한 탓이요.더불어 중앙에서 감시 관리하기 쉽다는 지리적 여건을 고려했을것이라 짐작을 하게된다.

하얀눈이 소복이 내렸던 날, 고려의 마지막 왕을 만나기위해 길을 나섰다.

막상 근처에 도착하고보니 몇번이나 지나다녔던 길이었음에도 그곳에 능이 있음을 미쳐 몰랐었으니 아는 만큼 보이고 관심을 가진만큼 알게되는 지식의 한계를 또 한번 떠올리게 된다.

큰 도로를 벗어나 작은 골목으로 들어서고보니 전형적인 작은 마을의 풍경이 펼쳐진다.

그러다 갑자기 전혀 예상치 못했던 모습의 제법 큰 규모의 사당이 나타났다. 그렇다면 이곳이 공양왕능인걸까 ? 싶어 살펴보는데 율원군 사당과 재실이었다. 율원군은 조선 제3대 왕 태종의 둘째 아들인 효령대군의 손자이자 보성군의 둘째 아들로 문무에 모두 능했으며,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자 큰 공을 세웠던 왕족이었다 하니 일전에 최영장군묘를 찾아가다 만났던 성령대군 ( 태종의 넷째아들) 묘와 더불어 고양시에서 만나는 두번째 왕족의 묘였으니 조선의 수도였던 서울과 인근해 있던 고양시의 지역적 특성을 알 수 있었던 대목이었다. 
 
제법 큰 규모로 율원군의 후손들이 관리하고 있던 이곳의 모습은 왕족의 후손으로서 번영했던 집안의 내력을 미루어 짐작하게 되었는데 그렇다면 고려시대의 마지막 왕의 무덤은 어떠할까가 더욱 궁금해졌다. 
 
그곳을 통과하여 2-3분이 지났을까, 멀리않은 거리에서 드디어 공양왕릉이 보이기 시작한다.
왕이 되기싫었던 왕, 왕위에 오른후 꼭두각시 왕노릇을 하다 2년 8개월만에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과 그의 부인 순비 노씨의 무덤이다.
 
그를 이야기하자면 고려 개혁을 단행하였으나 끝내는 실패한 공민왕과 우왕 창왕 그리고 공양왕으로 이어지는 고려시대 마지막 시간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공민왕 사후 고려의 국운이 기울대로 기운 상황에서 유일한 아들이었던 우왕은 왕위를 이어받게되나 그는 승려 신돈이 공민왕에게 소개했던 반야라는 여인의 소생으로 공민왕의 후사가 아닌 신돈의 아들이라는 설에 시달려야만했다. 하여 우왕 15세때 낳은 아들이 다시 창왕이 되나 이성계는 끝내 그들이 왕씨가 아닌 신씨라는 명분을 쫓아 왕실에게 쫓아내기에 이른다.

그후 이성계가 새로이 추대한 왕이 공양왕이었다. 그는 제 20대 신종의 6대손으로 당시 마흔다섯살이었으며 왕위에 오르는것을 너무나 두려워했다하니 선택받은 순간 죽음은 이미 예견된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러한 역사를 되짚어가며 돌아보니 유난히 쓸쓸해 보이는 능이다.
하얀눈이 소복이 내려앉은 모습이 평화스러워 보일법도 하건만 그와 달리 너무나 안쓰럽고 추워보일뿐이다.

사적 제 181호 고려공양왕릉

공양왕릉은 유배지요 사사지였던 강원동 삼척시와 고양시 두곳에 존재하는데 경기도 고양시의 공양왕릉은 사적 제181호로지정 문헌에 기록되어 있는 공식적인 능이고 강원도 삼척시의 공양왕릉은 민간에 오랫동안 구전되어 오는것으로 강원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나는 왕이 되기 싫다 ! 공양왕

고려왕가의 운명이 기울어 가던 1392년 어느 날 고양 건달산 기슭에서 헉헉거리며 쫓기는 한 사나이는 결국 군사들에게 붙잡혀 다시 개성으로 끌려간다. " 나는 왕이 되기 싫다 !" 수없이 외쳤으나 결국 왕이 되어 비운을 맞이했던 공양왕의 최후 모습이다.

승려 신돈의 집권과 홍건적, 왜구의 침입 등으로 정국이 혼란스러웠던 당시 신진사대부 이성계 등은 국운이 다 됐다며 새로운 국가를 세우려고 역성혁명을 일으켜 지배청을 숙청하였으니 이때 쫓기는 공양왕을 단번에 알아보고 밥을 날라주던 작은 암자에 스님이 있었으니 그 절이 유래되어 지금의 식사동이 되었고 비운의 공양왕은 원당동 왕릉골 산기슭에 이렇게 묻혀있었다.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 왕과 왕비의 쌍릉은 병풍석과 같은 화려한 장식은 하나 없고 무덤 앞에는 비석과 상석이 각각 하나씩 있었으며 두 무덤 사이에는 처음부터 세워져 있었다는 석등과 석호 그리고 무덤 양쪽에는 문신과 무신 상이 세워져 있어 외로움을 덜어주는 동시에 세월의 흔적을 말해주고 있을 뿐이었다.
 
공양왕릉 앞에 있는 삽살개 석상 !

거기에서 특이한것은 바로 이것, 삽살개상으로 이성계가 자신을 죽이러 올것을 예감한 공양왕이 밤을 틈타 송도의 궁궐을 탈출 무작정 남쪽으로 내달려서는 아내 노씨와 세자였던 아들석과 세 딸 그리고 아끼던 삽살개를 데리고 도착한곳은 고양의 견달산의 어느 암자, 스님이 가져다 주는 끼니를 연명하고 있을제 다시금 그들의 행적을 쫓아 온 관군에 의해 체포되기에 이르니 자신의 주인이 압송되는것을 슬퍼한 삽살개는 갑자기 연못속으로 뛰어들어 죽고 말았다한다. 
 

그것을 기리기위해 공양왕릉 앞에는 이렇게 삽살개상이 함께 있게 되었다하며 또한 능 입구에는 삽살개가 빠져죽었다라는 연못이 아직도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왕이 되기 싫었던 왕은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었으나 죽음을 무릎쓰고 자신을 돌보아준 스님이 있었고 끝까지 충절을
다한 삽살개가 있었으니 외롭지만은 안했을듯하며 결국 마지막 왕은 죽었지만 고려는 죽지 않은 것이었다 할 수 있겠다. 

그렇게 나란히 자리한 공양왕릉 뒤로는 그 내력은 찾아볼 수 없었으나 많은 묘가 있어 고려의 계승을 짐작해보기도 했다.

918년 왕건에 의해 건국되었고 34대 공양왕까지 475년간 존속하였던 고려는 4대 광종에 이르러 왕권이 강화되었으나 12세기 권력투쟁과 내분이 격화되어 무신정변이 일어나며 왕권이 약화되면서 무신들에 위해 지배되다 13세기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의 침입을 받아 끝내 굴복하지는 않았으나 전국토가 피폐화되었고 국력이 쇠퇴하기 시작했다.

 

결국 무신이었던 이성계와 그의 책사였던 정도전등이 주도하는 정치세력에 위해 1392년에 멸망하기에 이르니 그러한 나라 고려의 마지막왕이 잠들어있는 2기의 능위엔 하얗게 내려앉은 눈 사이로 따스한 햇살이 비쳐오고 있었다.

고양시는 그러한 공양왕릉과 함께 식사당이라는 지명 그 밖에도 고양왕이 머물렀던 암자가 있던 고개를 대궐고개라 불렀으며 왕이 잠을 잔 곳이라하여 어침이마을(언침미 마을로 바뀜)이라는 곳도 생겼으니 고려와 아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었다.
 

 <고려 공양왕릉 찾아가는길>


주 소 :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 산 65-6 
전화번호 : 031- 909-9000


 글. 사진 이민숙 (경기소셜락커 두공주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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