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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에는 서쪽에 있는 세개의 능이라 하여 서삼릉이라 이름 붙여진 왕릉이 있다.
중종의 제1 계비인 장경왕후가 잠들어 있는 희릉, 중종과 장경왕후의 아들인 인종과 그의 비 인성왕후 박씨가 함께 묻혀있는 효릉, 철종과 철인왕후 안동김씨가 잠들어 있는 예릉이 그것이다.

능이라 명명되어있는곳은 그렇게 3곳이지만 서삼능 경내에는 비공개지역이라 눈으로 직접 확인할수는 없지만 세자의 원(묘소) 3기와 역대 후궁, 대군, 군, 공주, 옹주등의 묘 45기와 함께 1929년 일제 강점기시절 전국 각지에 있던 태실의 태항아리들을 모아놓은 집결지가 되고있다.

이곳에 잠들어 있는 면면을 살펴보자면 중종, 인종, 철종의 세 주인을 비롯하여 폐비 윤씨와 문효세자, 의친왕등 살아생전 영광된 삶과는 다소 먼 불후하고 안타까웠던 왕족들의 모습이 떠올려진다.

시리도록 아름다운것이란 이런 풍경을 두고 한 말이었던가 !
안타깝고도 슬픈 사람들이 묻혀있는 곳이란 현실과 달리 눈이 내린 다음날 찾아간 서삼릉은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웠다.

그중 가장 먼저 찾아간곳은 세개의 능 중에서 좀 더 특별하게 느껴졌던 장경왕후가 잠들어있는 희릉이었다.
연산군이 페위된 후 왕위에 오른 중종에겐 세 왕비가 있었다. 첫째는 반정 후 즉위한 뒤 역적의 딸이라는 이유로 7일만에 페위당한 장경왕후 신씨, 둘째는 바로 이곳 희릉의 주인인 장경왕후 윤씨, 마지막 세번째는 세왕후를 두고도 중종을 독수공방하게 만든 문정왕후 윤씨이다.

이곳 희릉엔 중종과의 합장릉으로 정릉이라 명명된 적도 있었으나 1562년 서울 삼성동 정릉 자리로 중종릉이 천장된 후 장경왕후가 홀로 있게 되었단다.

저 너머 쌓인 눈 사이로 중종 원년에 숙위가 되고 그 이듬해 왕비가 된 두 중종10년에 맏아들인 인종을 낳고는 산후의 병으로 25세로 경복궁에서 돌아가셨다는 장경왕후 윤씨의 능이 살짝 보인다. 욕심을 부려 일부러 올라가 보고 싶은 마음이 살짝 들었으나 새하얗게 내려앉은 설경에 너무나 미안해 못하겠다.

하여 살짝이 올려다보는것으로 만족하곤 되돌아 나오는데 정자각과 어우러진 서삼릉의 풍경이 참으로 멋지다.

외로움이 물씬 풍겨나던 희릉을 돌아나와 두번째 능을 찾아가는 길, 누군가의 사후를 떠올리는 것과는 달리 참으로 멋진풍경과 조우한다.

그렇게 설경에 빠져 걷다보니 어느새 예릉에 도착했다.

 

예릉
은 조선 제 25대 철종과 왕비 철인왕후 김씨가 잠들어 있는곳이다.

전계대원군 광의 세째 아들이었던 철종은 헌종이 재위 15년만에 자손이 없이 돌아가시자 순조의 비 순원왕후 김씨가 강화도에 살고 있던 철종을 불러들여 19세때 창덕궁 인정전에서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처음에는 대왕대비가 대신하여 나라를 다스렸고 그 뒤로는 외척의 세도로 인하여 국정을 바로잡지 못하고 재위 14년 12월에 창덕궁에서 돌아가신 왕이었다.

정자각 옆에 자리한 비각의 모습이다.

예릉은 살아생전 허수아비 왕이었던 삶과 달리 죽어서는 화려한 자리를 갖게되었는데 철종에 이어 왕위에 오른 고종은 왕실의 세도정치를 타파하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의도로 예릉의 석물과 부속건축물을 웅장하게 조성하였다 한다.
정자각 또한 다른곳에 비해 웅장하고 정자각에 이르는 참도 또한 기존의 2단이 아닌 3단으로 되어있다.

국조오례의에 의거한 마직막 능인 예릉은 왕릉과 왕비릉이 나란히 놓인 쌍릉으로 두 개의 봉분을 에워사고 난간석을 설치하였으며 난간석 기둥에는 방위를 나타내는 12간지 문자가 새겨져 있단다. 그 앞에는 혼유석과 망주석 석양, 석양 문인석 무인석 석마 장면등의 석물이 배치되어 있어 그 화려함을 더하고 있다.

화려한 능을 보고 나왔기 때문인가, 쭉 뻗어오른 나무를 보고 있자니 기울어가는 국운속에서도 다시 한번 부흥을 꾀하였던 고종의 기상이 느껴진다.

서삼릉의 세개의 능 중 희릉과 예릉을 보고난후 마지막에는 효릉을 만나겠거니 예상하며 찾아가는데 그것을 대신하여 효창원과 의령원이 나타난다.

효창원은 조선의 마지막 부흥기였던 제22대 정조의 큰 아들이며 의빈 성씨의 소생으로 다섯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문효세자의 묘소였고 령원 영조의 세손이자 장조인 사도세자의 첫째 아들로 3세의 나이로 일찍 떠난 의손세손의 묘소였다.

세살이란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의손세손의 삶도 안타깝지만 만약에 살아주었더라면 조선의 역사가 바뀌었을것이라 생각하게되는 문효세자의 죽음은 더더욱 안타깝기만 했다.
묘에 앞서 능이 아니기에 정자각 대신 들어선 건물인 듯 지금까지 보아왔던 모습과는 다른 건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또한 그 두개의 원은 들어갈 수 없게 막아두었던 앞의 능과 달리 묘 앞에까지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놓여있어 반갑다.

그리곤 어느것이 효창원이고 의령원인지 구분하지 못할 2개의 원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었다.

조선시대 왕실사람들을 살펴보자면 참 많은 사람들이 단명했음을 알게된다.
주어진 권력만큼이나 신경써야할것도 제약들도 많은탓이요, 구중궁궐에서의 숨막히는 권력의 중심에 놓여있던 신분 때문이었으리나...

그밖에 서삼릉의 세개의 능중 마지막으로 인종과 그의 비 인성왕후 박씨가 함께 묻혀있는 효릉을 비롯하여 태실과 그밖의 여러 왕족의 묘들은 비개방지역으로 만날수가 없었다.

때마침 내린 눈으로 시리도록 아름다웠던 서삼릉을 돌아나오는 길, 화려했던 삶보다는 권력의 소용돌이의 중심에 놓여있음으로 겪어야만 했던 아픔들이 오롯이 느껴져온다.

그들은 과연 살아생전 행복했을까 묻는다면 그다지 행복한 삶은 아니었었다라는 대답이 들려올 듯 하였으니 서삼릉에서의 시간은 평범한 삶 또한 그다지 나쁘지만은 않다라는 보통의 진리가 떠오르는 문화답사였다. 

 

 <서삼릉 찾아가는길>



주 소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산37-1


글. 사진 이민숙 (경기소셜락커 두공주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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