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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남미 문화원은

가수지망생들의 청춘드라마

"드림하이"의 촬영지란다

 

드림하이는 2011년에 제작되었으며

마야문명과 아즈텍문명, 잉카문명이 꽃피웠던

중남미지역의 문화원이며

경기도 지역 테마박물관 제1호란다

중남미문화원 박물관은

코스타리카, 도미니카, 아르헨티나, 멕시코 등

중남미지역에서

외교관 생활을 약 30여년간 했던

이복형씨가

부인 홍갑표씨와 함께

중남미 문화의 전시를 통해

지역발전을 이루고

아름다운 미래에 대한

인류의 꿈을 공유하고자

설립했단다

중남미 문화원 및 박물관을 겸한 다는 표현인 것 같다

 

중남미문화는 어떤 내용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대체로

콜롬부스가 아메리카를 발견(서인도 제도 : 카리브해 지역)하기 이전

문명을 꽃피웠던

마야문명

아즈텍문명

잉카문명을 이야기한다

 

마야문명이란 어느 지역에서

꽃피웠을까

 

마야문명은 멕시코 및 과테말라를 중심으로 번성한

인디오문명을 말한다

 

마야문화가 번성한 지방은 3개 지역으로 구분되나

그 중심을 이룬 곳은 과테말라(중미지역) 북부지방으로부터

멕시코 타바스코

벨리즈지방에 이르는 지역을 말한다

중남미문화원 박물관은 연중무휴로 운영하며

동절기는 10:00~17:00까지

하절기는 10:00~18:00까지 운영한다

 

요금은 성인이 5,500원

학생 및 군인이 4,500원

어린이는 3,500원이란다

 

 

아즈텍문명이란

멕시코 중앙공원에서

옥수수, 양파 등을 재배하는 화전농업을 기반으로

도시, 사회조직, 정치기구, 토지제도를 정비하고

신권정치를 이루었다

 

아즈텍인들은

금욕적이었고

전쟁터에서 죽는 것을 대단히 높게 평가했다

태양신문화와

석조문화가 발달했으며

그들이 섬기는 신은 공통적으로

구름을 타고 피를 요구하는 신들이다

                                                                 태양신을 상징하는 것 같다

중남미문화원은

박물관

미술관

조각공원

중앙홀

종교전시관

마야벽화 등이 있다

 

                                                       태양신과 성모마리아를 표현한 것 같다

잉카문명은

15세기부터 16세기초까지

남아메리카 중앙안데스 지방(페루, 볼리비아)을 지배한

고대제국을 말한다

 

특징으로는

신성한 절대군주 잉카를 받들고

친족인 지배층과 일반평민으로 구성되는

계층사회를 형성하였다

 

수도는 페루의 쿠스코이며

황제를 중심으로 태양신을 섬겼다

도시를 세우고

각 지역의 산물을 운반하기 위해

산중에 도로를 건설하였으며

옥수수, 감자, 호박, 땅콩, 목화 등을 재배하였다

 

1532년 스페인의 침공을 받아

제국의 조직이 무너지고

1533년 피사로에 의해 멸망하였다

밖에서 촬영한 모습이다

 

그렇다면 인디언은 아메리카에

어떻게 살게 되었을까

 

옛날에는 아시아와 북아메리카가 연결되었단다

하여 인디언은 아시아에서 아메리카로

옮겨오게 되었으며

 

그때에는 북아메리카(캐나다, 미국)가

얼음으로 덮여있었단다

 

점차 빙하기가 풀리며

긴 회랑(통로)이 열리고

회랑을 따라

아메리카 전역으로 흩어지게 되었단다

위의 건물은 박물관 및 미술관을 겸한 건물인 것 같다

 

의문이 생긴다

왜 인디언이 얼마 남지 않았을까

유럽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은

소수였을텐데 말이다

 

유럽인들이

인디언을 닥치는대로 죽여서 그랬나

물론 죽이기도 했겠지

 

결정적인 것은 병이란다

유럽에서 흑사병이 돌았듯이

아시아에서 돌림병이 있었듯이

하여

아시아인이나

유럽인은

병에 내성이 생겼단다

하지만 인디언은 고립된 지역에서

병에 대한 내성이 없었기에

유럽인들이 가져온 병에

속수무책으로 당하였단다

다시 한 번 촬영하였다

 

그래도 의문이 생긴다

북미(캐나다와 미국)에는

극소수의 인디언 밖에 없을까

 

영국인과 프랑스인(위그노 : 종교 박해를 피해온 신교도)은

선민사상이 있었단다

인디언과는 다른 특별한 사람들(유럽인)

 

종교의 박해를 피해서 왔기 때문에

가족 전체가 옮겨오게 되었단다

하여 선민사상 및 가족단위 이주로

인디언과의 피가 섞이지 않게 되고

크게 찍어 보았다

 

하지만 남미에 온 스페인, 포루투칼인은

팍스 로마나로 대표되는

세계의 하느님화를 주장하고

 

가족단위 이주가 아닌

모험심이나 돈을 벌려는 사람들이

단독으로 왔기 때문에

 

인디언과의 자연스런 결혼이

이루어졌고

남미지역 많은 곳(멕시코)에선

메스티죠(인디언과 유럽인의 혼혈)가

가장 많은 수의 인구를 차지하는 일이

이루어졌다

누워있는 모습인데

무엇을 표현했을까

칼을 든 기사의 모습이다

유럽 중세의 기사를 표현한 것일까

 

남미에 가면 사람들은 어디를 꼭 가보고 싶어할까

폭포가 유명한 아르헨티나

춤과 관련있는 브라질 등을 꼽을 수 있으나

 

보다 문화적인 접근을 하는 사람들은

마추픽추(공중도시)

나스카(사막에 그려진 그림) 등을

보고 싶어한다

조경을 찍은 모습이다

고양 향교의 모습이 보인다

 

또 콘도르라는 새에게도 관심을 가진다

아니면 인디언의 삶을 볼 수 있는

티티카카호 주변이나

마추픽추에 가기전 우르밤바 등에서의

추억을 가지고 싶어한다

 

매표소에 가서

팜플랫을 보고싶다고...

하여 1부를 얻게 됐다

중남미문화원은 재단법인이며

 

마추픽추란 어떤 곳일까

표고 2,940m의 마추픽추산과

표고 2,690m의 와이나비추 산에 둘러싸인

표고 2,400m의 산록에 조성된

지상에서는 볼 수가 없고

공중에서나 발견될 수 있는 곳이라고 해서

공중도시라고 하였다

 

다행이도

스페인 군대에 발견되지 않아

1911년 미국의 역사학자 하이람 빌감에 의해 발견되고

세계인의 관광지가 될 수 있었다

박물관 건물과

중앙홀의 모습이 보인다

 

마추픽추는 잉카인들의 이중성

(상과 하, 우측과 좌측, 남성과 여성, 시간과 공간)이라는

믿음을 토대로 하는 절묘한 위치에

의도적으로 건설되었단다

 

우선 마추픽추는 와이나픽추라는

원뿔모양의 봉우리와 마주보고 있는데

와이나픽추는 잉카인들이 토템으로 신봉하는

두가지 동물의 형태를 갖고 있단다

 

와이나픽추 봉우리를 앞에서 보면

마치 퓨마의 형상으로 보이며

좌측에 있는 세개의 작은 봉우리는

마치 콘도르새가 날고 있는 모습으로 보인단다

 

잉카인들에게 와이나픽추는

지상과 천상의 세계를 보여주는 신성한 산으로

그곳에서 바라보이는 대지에

신성한 도시를 건설한 것이란다 

미술관 건물과

종교 전시관의 건물이 보이고

 

이처럼 훌륭한 건축물을 만들고

고도로 기술이 발달했던 잉카제국이 어떻게

망하게 되었을까 

 

잉카인들은 백인처럼 몸이 하얀 "비라코챠"라는

인물이 존재하였다고 믿고 있었단다

태양을 섬기며 태양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비라코차"는 바다로부터 와서

잉카인을 존중하고 사랑하며

결코 힘을 사용하지 않으며

잉카인들에게 문명을 가르쳐주고 사라졌다고

믿고 있었단다

 

헌데

정말 전설속에 잉카인들은

언젠가는 그가 사라진 방향에서

다시 되돌아 온다는 믿음을 가졌는데

그런 전설속에 각인된 잉카인들에게

정말 "비라코차"가 사라진 방향에서

희한하게 생긴 동물(말)을 타고

처음보는 무기(화승총)을 가지고

몸이 하얀 여러 명의 사람들이 나타난 것이다

 

피사로는 그러한 사실을 재빨리 간파하고

스스로 전설속의 비라코차로 행세를 했다

그리고 황제를 사로잡자

후위의 무장한 인디언도

더 이상 저항하지 않았으며

스페인군은 잉카제국을 정복하게 되었으니...

조각공원과

마야벽화가 나타난다

 

조각공원을 찍어봤다

 

도미니카공화국의 비도가

아크릴유채로

새를 표현했다

 

콘도르새란 무엇인가

남미에서 서식하는 육식성 조류로

날개가 3m란다

하여 날기 위해서는

한참을 하강한 후에야 날 수 있단다

거대한 날개로 날개짓을 하기 보다는

두 날개를 활짝 편채 기류를 타고 이동한단다

 

콘도르는 한번 날기 시작하면

하루정도 내려앉지 않아도 가능하고

간혹 비행을 하면서 잠을 잔단다

상승과 하강 계곡의

바람이 만들어낸 기류를 이용해야 하기 때문에

고산지대에서만 산다

 

콘도르를 잡기 위해서는

먹이를 곳곳에 놓아두고

배불러서 날지 못할 때 잡는다

 

콘도르라는 새는

인디엔들에게 신성성을 갖게 하고

콘도르를 통해

주민들을 하나가 되게 하고

 

콘도르에게 먼저 술을 먹인다 

그리고 수십마리중의 가장 힘센 소를 뽑는다

그리고 고른 소위에 콘도르를 묶는다

사나운 부리로 콘도르는 소를 쫀다

결국 소는 지쳐서 쓰러지게 되고...

 

인디언들은 승리를 선포한다

스페인에게 이겼다는 승리의 선포를...

 

그리고 콘도르를 놓아준다

콘도르가 날지 못하면 안된다

마을에 불행이 닥친다고...

 

갑자기 하늘에서 콘도르가 나타난다

콘도르가 비행을 위해 절벽에 자세를 잡는다

그리고 창공에 힘껏 몸을 맡긴다

 

사람들에게 콘도르는 영원히 꺾이지 않는 영웅이다

멕시코의 몬띠엘이

브론즈로 가족을 표현했다

빠에야 음식의

풀코스란다

따코음식이다

중남미문화원을 찾을 때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이 있으며

지도로도 표현했다

미진한 부분은

직접 방문해서

보고

느끼고

감상하기 바란다

선유랑마을이 2.31km란다

천천히 걸어가볼까

지나온 곳을 돌아본다

이 담을 따라서 가다가

대자산을 넘으면

최영장군의 묘소가 나타나겠지

 

선유랑 체험마을로 향한다

코사마트를 거쳐

 

안내표지판앞에서

좌회전을 한 다음

걸으면 되겠지

 

안내판이 나타난다

선유랑마을 2.16km 

벽제관지 0.46km란다

안내판을 따라

작은 야산을 넘는다

눈이 덮여 있어 알 수 없으나

담을 두른 것으로 보아

밭인 것 같다

밭옆으로 난 길을 따라

쭉 걸어간다

사람의 발길이 있는 곳에는

낙엽이 겉으로 나타나 있다

능선길따라 걷는다

다시 내려가는 길이다

눈에 덮여 있는 건물이 보인다

도로도 보이고

읍내로란다

옛 고양군 중심이었단다

하여

이름도 고양동이지 않는가

교통 표지판에는 벽제관지를 가르키는

방향이 표시되어 있으니

벽제관지가 0.32km란다

화성아파트 방향으로 간다

음식점 등 상점가가 이어지고...

드디어 벽제관지에 도착했다

벽제관지에 대한 안내판도 보이고

어떤 내용이 적혀 있을까

벽제관지에 얽혀있는 내용이 궁금해진다

이곳은 중국을 오가던 고관들이 머물던

지금으로 치면

잠을 자는 여관같은 곳이란다

 

조선시대에는 중국으로 가기 위해서는

머물다 떠나고

또 걷고

머물다 떠나고 하여야 하는데

한양에서 의주까지

약 10여곳이 있었단다

 

한양에 들어가기 하루 전에

반드시 벽제관에서 숙박하고

다음날 예의를 갖추어

서울로 가는 것이 관례였단다

벽제관의 전경이다

중앙의 청사와

좌우의 익사로 구성되었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구성되어 있단다

익현의 공포이다

아름답지 않은가

정청의 모습과 익헌의 모습이다

정청과 익헌의 뒷면이다

이곳 지명을 고양동이라고 하는 것은

1625년부터 1914년까지

고양군청과 벽제관과 같은

중요한 공공건물이 있어 그렇단다

 

고양동은 파주, 양주, 고양지역이 만나는 곳으로

옛부터 교통의 요충지였으며

중국의 사신과 우리나라의 고위관리들이

자주 지나는 경의대로(연행로, 의주로, 관서대로)의

중심건물이 벽제관 이었단다

 

벽제관의 또 다른 기능은

고양군수가 전패, 궐패를 모시고

임끔께 예를 올리는 장소로

 

외부에서 온 관리나 손님이 머물던

공용의 숙박업소,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가

지방 소송에 대하여

재판하는 장소도 되었단다

 

벽제관 가장자리에

오래된 향나무가

묵묵히 서 있다

 

조선에서 중국 사신을 영접하는 모습을 생각해보자

 

조선의 왕과 문무대신들은

중국 황제나 황태자의 생일 등에는

중국 궁궐 쪽을 향해

축하의 예를 올리는 망월례를 행하였다

 

중국 사신이 조선에 오면

조정에서는 2품 이상 관리를 파견해

사신들을 영접하였고

세자는 조정대신들을 거느리고

직접 성밖의 영은문과 모화관까지 나가

사신들에게 두번 절하는 사대의식을 거행하였다

 

사신이 도성에 도착하면

세자부, 종친부, 의정부, 육조에서 돌아가며

일곱차례의 연회를 베풀었다

안쪽에서 바라본 안내판의 모습이다

 

영은문과 모화관의 뜻을 보라

은인을 맞아들이는 문

중국을 사모하는 여관...

 

받들어 기쁘게 맞이하고

중화 즉 중국을 한없이 우러러

흠모한다는 뜻이지 않는가

발굴했던 당시의 모습이다

 

중국에 파견했던 사신의 종류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먼저 정기적으로 가는 사신이 있다

신년인사차 가는 하정사

황제의 생일을 축하해주기 위해 성절사

황태자 생일을 축하해주기 위한 천추사가 있다

 

비정기적인 산행은

필요에 따라 수시로 이루어졌다

각종 보고나 해명할 일이 있을 때 주문사나 제품사를 파견하였고

특별한 요청을 하기 위해 주청사를 파견하였으며

중국에 감사한 일이 있을 경우 사은사를 파견하였고

황제 등극이나

황제자 책봉을 축하하기 위해 진하사를 파견하였고

마지막으로 황제나 황후의 상(喪)에 진위사를 파견하였다

벽제관이라는 현판과

정청이 보인다

 

벽제관 하면

또 하나 떠오르는 것이 있으니

임진왜란 시

하나의 획을 그은 벽제관 전투이다

 

1592년(선조 25년) 4월 14일

정명가도(명나라로 가기 위해 길을 비켜달라)를 외치며

일본을 통일한

토요토미히데요시(풍신수길)는

일본군을 동원하여 조선을 침략했다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승리하였으며

급기야 6월에는 평양성을 점령했고

선조는 의주로 몽진(도망)해야 했다

 

1593년 1월(선조26년)에

명의 이여송장군이 이끄는 원병이 오자

명군, 조선관군, 의병, 승려군이 합세하여

평양을 탈환하고...

 

평양성에서 대패한 일본군은

서울로 후퇴하고

고바야가와 등을 선봉으로

다시 총력을 기울여 반격하고... 

태극문양이 있는

벽제관의 삼문의 모습을 보라

 

어디와 비슷한지

 

평양 승전의 여세를 몰아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한 명군은

1593년 1월 25일 개성에 입성하고

부총병 사대수는 수백명의 군사를 이끌고

파주 부근을 점령했다

 

이어 명군은 

서울에서 일본군의 주력부대를 섬멸하기 위해 출동했고

일본군도 명군을 공격하려고 북상했다

 

일본군의 선봉은 여석령(숯돌고개 : 지금의 덕양구 삼송동)에 진을 치고

명군이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급습했고

 

명군은 기병 위주로 짜여져 있었으나

날씨마져 따뜻해지면서 길이 풀렸고

비까지 내려 길은 진흙탕이 되고...

더군다나 벽제에서 여석령까지는 길이 좁고 험했으니

 

이때 명군(사대수)은 기병이었으나

일본군은 보병인데다가 숫자도 훨씬 많아

이여송 군대가 오기 전에

명군은 붕괴되고...

 

고양 향교의 대성문이다

삼문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은가

태극문양의 삼문...

 

벽제관지의 삼문과 비슷하지 않은가

 

이 소식을 들은 이여송 장군은

혜음령(지금의 고양시와 파주시 광탄면의 경계)을 넘어

벽제관으로 급행하여 망객현으로 진출했다

 

그때 명군은 기병(말을 탄 군인) 위주로 진출하였기 때문에

무기로 짧은 칼을 가지고 있었으나

일본군은 보병위주로 준비하였고

자기 키보다 큰 2m의 장칼을 가지고 있었다 

눈으로 덮여 있는 벽제관의 모습이다

 

일본군은 기병 위주의 명군에게

조총으로 집중사격을 하였고

장칼을 이용하여

말과 명군의 목을 쳐 냈다

 

명군은 길이 수렁이 되어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으며

 

일본군은 사방에서 달려들어

명군 기병을 수렁 위의 백병전으로 몰아붙였고

일본군 병사들은 자신 키의 2배를 넘는 대도로

명군의 기병과 말을 한번에 베어 벼렸다

 

이여송은 황급히 후군을 부르게 하였지만

후군은 도착하지 않고

점차 쓰러져 죽는 명군 장수와 병사들은 늘어났고

일본군은 이여송의 군대를 2중으로 포위하여

압박했다

 

마침내 이여송이 힘껏 싸우다 쓰러지고

말이 넘어지면서 진흙에 빠지자

일본군이 그를 죽이려고 달려들고...

 

이여송의 휘하 장수 이유승이

자신의 몸으로 일본군의 공격을 막아내다

장렬히 전사하고...

 

이러한 사투는 2시간동안 이어지고

오후 3시에 이르자

명군 1만명이 도착하여

일본군에게 맹렬하게 화기와 화포로 공격하고

이여송은 포위를 뚫고 탈출할 수 있었으니...

 

전쟁에서 퇴각한 이여송은

파주로 가다가 멈춰서 눈물을 흘리고...

이 전투로 명은

조선에 파견된 장수의 25%가 죽는

참담한 결과가 나왔으니

 

명군은 파주로 후퇴했다가

개성으로 물러났으며

 

이를 계기로

명군은 전투에서 적극성을 잃어

일본군을 섬멸할 기회를 놓쳤다

 

이여송에 대한 일화가 있으니

파주로 퇴각하던 대열에서

원수의 깃발을 보고 말하길

이것을 없애버리지 않고

보전하여 다행이다 라고 하였단다

 

또한 이유승의 사위 왕실을 불러 말하길

호남아(좋은 사내, 훌륭한 사람)가

나를 위해 죽었다라고 했단다

 

그날밤 이여송은 죽어간 부하들 때문에

눈물을 흘렸단다

주춧돌로 쓰였을 돌이

한쪽에 가지런히 쌓여있다

 

벽제관 전투는 행주대첩과 같이

대격전이었으나

지원 나왔던 명군이 대패하여

알려지지 않았다

 

1월 29일 명군은 거의 철수하고

유성룡이 이여송에게 다시 진군할 것을 권하니

날이 개고 마르면 진군하겠소 라고 했다

 

글 출처 : this is total war 블로그

벽제관 뒤에는 우람한 나무가

말없이 벽제관을 바라보고 있고

 

현재는 고양근린공원이란다

큰 돌들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박혀있다

큰돌 하나를 사진에 담아봤다

돌은 나에게 말을 걸려고 한다

내가 여기 있는 동안

무수한 일이 있었다고...

 

수많은 사신들이 중국으로 가기 위해

머물렀고

 

대접을 받으며 머물렀던

중국사신들의 모습들...

 

중국의 명장 이여송 장군이

평양성 전투에서

승리하고

자만심에 빠져

벽제관에서 대패하고

자신감을 잃게 되고

 

이후 전쟁은

장기화 되고

 

벽제관을 보면

생각나는 곳이 있으니...

서울 서대문에 있는 서대문 독립공원의 모습이다

독립문 앞에 놓여 있는

기둥이 보이지 않는가

중국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 주초란다

 

대장금에서

중국사신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모습이 나온다

 

병에 걸린 중국사신에게

장금이가

채소로된 음식을 대접해

나중에 중국사신으로부터

크게 칭송받는 모습이 떠오른다

모화관의 정문인

영은문의 기둥을 받쳤던 초석이란다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기 위해

현 위치에 모화루를 짓고

홍살문을 설치하고

후에 영은문이라 하였다

 

서재필이 주도한 독립협회는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서는

어떠한 외부간섭도 받지 않겠다는...

 

하여

중국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자리에

파리의 개선문을 본따

독립문을 세우니...

 

자랑스럽지 않은가...

우리의 선조들이

 

자주개혁의 높은 기치를 들고

추진했던 모습이 상상된다.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였으며

 

러시아의 조차에 반대하고

 

독립과 민권사상 신장에 기여하였으나

결국 조선정부 및 외국에 의한 방해로

성공하지 못하였으니...

고양근린공원에서

벽제관을 바라보고

따뜻한 양지쪽에서

햇볕을 쬐고 있는

할머니들이 보이지 않는가

조금 크게 찍어봤다

벽제관지를 탑방하고

다시 돌아왔다

안내판이 보이고

아파트가 보인다

아파트 방향이

선유량마을 가는 길이다

선유랑마을이 1.9km란다

아파트를 따라 간다

유셀이라는 아파트다

유셀이라는 아파트를 돌아

쭉 앞으로 간다

보이는가

전봇대에 바싹 붙어있는 안내판이...

그리고 한쪽 방향이 빠져나갔다

설치도 중요하지만

관리도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보자

인도 폭도 좁은데다가

전봇대에 가려서 잘보이지 않는데

하물며 가르키는 방향이

두군데나 없어졌으니...

 

결국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벽제천에 있는 다리위에서

물가를 바라보았다

 

무엇이 잘못됐는가

혹시 지나친 것은 아닌가

갖가지 상념이 꼬리를 물었다

흐르는 물속에

헤엄치는 새(오리)들을 보며

잠시 시름을 잊었다

그리고 버스정류장으로 찾아와

버스 노선을 보았다

선유동 마을과 안장고개에

버스가 내리는 것을 확인하고

안장고개 가는 버스에

올랐다

 

그리고 안장고개에서

여기까지 거꾸로 돌아왔다

 

돌아와서 자세히 살펴보았다

확인하니

안내판이 수리가 필요함을 느꼈고

이곳을 떠날 때 보지 못한

다음 안내판도 보였으니...

당황했었나 보다

안내판을 보지 못해서...

 

안내판을 확인하고

이 그림판을 보았다면...

교통표지판을 바라본다

저쪽에 차가 있는 곳으로 길이 있단다

도예연구소를 거쳐

산을 오르면

선유랑마을을 거쳐 안장고개까지 갈 수 있으니...

 

다음에 오실 분은

도로를 건넌 다음

좌측으로 가서

중국음식점을 돌아

산쪽으로 오르면 된다

 

다음 4편에서는

이곳에서 선유랑마을을 거쳐

안장고개까지 가보고자 한다

 

그곳에서 무엇이 있을지 궁굼하다

 

식사동 주민센터 길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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