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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고양의 조선시대 개관

 

건국부터 1503년까지의 고양 - 고양의 이름을 얻다

 

고려시대 양주의 속현으로 있던 고봉현이 지방관이 파견되는 주현으로 행정구역에 편제된 것은 조선 태조 3년(1394)에 감무(監務)를 설치하면서부터 입니다. 감무는 고려중기 속현을 주현으로 삼아 지방관제를 확대하면서 설치한 것으로 정7품관의 지방관을 가리킵니다. 이 감무는 조선 태종 13년 지방제도 개편에 따라 속군·현(屬郡縣)과 향(鄕)·소(所)·부곡(部曲) 등 특수 지방행정 단위를 일반 현으로 편제하면서 현감(縣監)으로 통일되었습니다.

태조3년에 고양지역에 고봉감무를 설치하면서 속군·현으로 있던 행주·고봉·부원과 황조향을 이에 예속시켰습니다. 부원은 오늘날 서울특별시 용산구에 해당되는 지역이었지요. 황조향은 다른 이름으로 주엽리(注葉里)라 하였는데, 오늘날 일산구 주엽동 일대로 충선왕 2년(1310)에 승격된 부평부 소속의 향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때 군치(郡治) 서쪽 20리쯤 되는 곳의 율악부곡(栗岳部曲-밤가시)과 동쪽 10리 건자산(巾子山) 아래에 있는 장사향(長史鄕)도 고봉에 예속되었습니다. 이외에 행주에 파을곶소(巴乙串所)와 건자산소(巾子山所)도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조선이 건국함에 이르러 태조3년에 도읍을 개성에서 한양부(漢陽府)로 옮겨 도성 일대를 한성(漢城)이라 칭하고 성저십리(城底十里) 지역을 관할하는 등 한양부 부근 군현제를 정비하였습니다. 이 해 8월 28일에 심악(深岳-尋鶴)·교하(交河)·석천(石泉)의 각 현을 병합하여 교하감무(交河監務)를 설치하고, 동시에 앞에서 살핀 것과 같이 고봉감무(高峰監務)를 설치함으로써, 오늘날 고양시와 대략 비슷한 지역을 관할구역으로 하여, 서울과 밀접한 관계를 갖게 하는 하나의 지방행정구역으로 등장한 것입니다.

나아가 태종 13년(1413) 3월 23일에 지방제도를 개편하면서 고봉과 덕양(행주)의 두 고을 이름에서 앞· 뒤 한 자씩을 취하여, ‘고양(高陽)’이라 칭하고 현감을 설치하였고, 원당리에 고양의 치소(治所)를 두었습니다. 이때부터 고양현·고양군·고양시로 변하면서 고양이라는 지명과 행정구역이 출발되었습니다. 당시 고양현의 경계는 동쪽으로 양주까지 6리, 서쪽으로 교하까지 30리, 남쪽으로 한강까지 15리, 북쪽으로 원평(파주)까지 15리였습니다. 이어 1414년에 교하군의 심악고현(深岳古縣)에 소속되었다가, 1418년에 다시 환속되었습니다.

세조 3년(1457) 의경세자(덕종으로 추증)의 묘소를 고양현 치소(현 서삼릉 지역으로 추정) 동쪽에 안장하고 제사지냈습니다. 그 후 고양현은 성종 2년(1471) 10월 13일에 이르러 지금의 덕양구 용두동에 덕종과 소혜왕후의 능인 경릉(敬陵)과 예종과 안순왕후의 능인 창릉(昌陵)의 두 능이 있으므로 지방행정단위를 현(縣, 縣令은 5품관 縣監은 6품관)에서 군(郡, 郡守는 4품관)으로 격을 높여 고양군(高陽郡)으로 삼았지요. 당시 고양군의 위치는 동쪽으로 양주, 서쪽은 교하현, 남쪽은 한강을 건너 양천현, 북쪽은 파주군과 경계를 이루었으며, 서울에서의 거리는 32리였다고 합니다.

 

1504년 ~ 1506년 - 고양을 없애다

 

한편 16세기 초 연산군 때에 와서 고양군 일대는 황폐화되었습니다. 즉 연산군 10년(1504) 가을에 왕의 놀이와 사냥을 위하여 도성 밖의 민가를 철거하고, 또한 한성으로 통하는 도로는 노량진 방면을 제외하고는 모두 막아 일반백성의 교통을 차단한 것입니다. 또한 놀이와 사냥의 지역을 확장하여 서울 인근 고을인 고양·양주·파주 등지에 미쳤으며, 나아가 한강 건너 광주·양천에 이르렀습니다. 따라서 백성들은 삶의 터전에서 추방되었고, 내수사(內需司)의 노비를 대신 살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되자 백성들의 원망은 점점 커지고, 고양군을 비롯한 각 고을은 황폐화되었으며, 고양군은 혁파되어 양주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강화로 유배되어 죽임을 당하고, 중종이 즉위하자, 연산군의 폐정을 개혁하는 한편 고양군 등 각 군이 다시 복원되었습니다. 이때 약 2년 간에 걸쳐 서울 인근의 군현은 폐허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썼으나, 복구되는데 많은 세월이 걸렸다고 합니다.

 

16세기 초부터 조선말까지 - 교통의 중심에서 왕족을 만나다

 

중종 32년(1537)에 희릉(禧陵)을 원당리로 옮기게 되자 군청을 장령산(長嶺山) 동쪽으로 옮기는 일이 논의되다가, 중종 39년(1544) 5월 10일에 이르러서야 실행되었습니다. 군청의 이전이 늦어진 이유는 1537년 6월 19일 권신 김안로(金安老)가 사후 자신의 묘지로 쓰기 위해 ‘400여 호가 철거되어야 한다’‘관속이 의지할 곳이 없다’‘떠도는 백성이 발생한다’‘고을을 옮겨야 한다’ 는 등의 주장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왕이 고양의 산세를 그려 아뢰게 하는 등 새로운 군청의 터를 잡기 위한 논의가 있게 되자 불가피하게 군청의 이전은 지체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후 10월 28일에는 고양의 관사를 지으면서 군인을 대신하여 아직까지 승군(僧軍)을 부리고 있다는 비난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의항(蟻項-개미목)의 역사를 아직 끝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사신의 왕래에 따른 군민들의 동원으로 그들의 피로가 극심하여 군민을 또 새 군청공역에 동원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승군으로 하여금 비난을 무릅쓰고 공역을 마칠 때까지 계속해서 일을 시킬 수밖에 없었지요. 이후 군의 관할구역은 조선말까지 큰 변화가 없었답니다.

 

조선시대 고양지역의 역사 문화적인 특징

 

한편 조선시대 고양지역의 역사 문화적인 특징을 살펴보면 이어질 내용처럼 정리할 수 있습니다.

즉, 서북 교통로와 중국과의 사행길, 역대 임금의 사냥터와 강무장(講武場), 그리고 왕릉을 비롯한 왕실과 권문세가들의 묘역으로의 역사지리적인 특징을 보이지요. 또한 임진왜란 때는 의병이 활동하였고, 벽제관전투에 이은 행주대첩의 현장이었으며, 이에 따른 사당과 교육기관이 마련되었습니다. 그리고 조선 숙종 때는 한양도성의 이성체제로 북한산성이 축조되었습니다. 그럼 좀 더 자세히 살펴볼까요?

 

첫째, 조선시대 고양지역은 조선왕조의 수도인 한성과 고려왕조의 수도였던 개성을 연결하는 교통의 길목이었으며, 개성 인근에 있는 태조 이성계의 왕비인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의 제릉(齊陵)에 참배갈 때 머무는 객관이 있던 곳이기도 합니다. 더욱이 조선시대 중국과의 사행(使行) 길이던 서북로의 첫 관문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대개 사행의 노정은 서울을 떠나 고양-개성-평산-황주-평양-의주-압록강-산해관-북경의 육로 3,100리에 50일의 일정이었다고 합니다.

한편 사신이 출발하기 전에 서울 서북쪽의 벽제(碧蹄)에서 의주까지 사행이 간다는 선문(先文)을 보내 그 일정에 따라 통과 지점에서 미리 준비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정사·부사·서장관의 세 사신이 대궐에 들어가 하직 인사를 한 뒤 서울 서대문구에 있던 홍제원(弘濟院)에서 관인들의 전송을 받으며 연경(燕京-北京)을 향해 떠났으며, 첫 정착지가 고양의 벽제관이었던 것입니다. 현재의 벽제관 터는 인조 3년(1625)에 새로 세운 객관이있던 곳이며, 건물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때 모두 무너졌습니다.

중국의 사신이 올 때는 서울에 들어오기 전 반드시 벽제관에서 하루를 묵게 되는데, 이때 임금이 사신을 맞이하는 관인을 보내 원행의 노고를 위로하였습니다. 이튿날 새벽 사신 일행은 서울로 들어오면, 임금은 무악재 아래에 있는 모화관(慕華館)에 나와 조사(詔使)를 맞이하여 남대문을 통하여 경복궁 또는 창덕궁으로 들어와 외교문서를 전달하는 의식을 거행하였습니다.

그런데 사신 일행의 여비는 국내에서는 경유지 인근 고을의 부담이었고, 국경을 넘으면 정부 즉 호조에서 담당하였다고 해요. 따라서 고양 등 사행로에 있는 고을은 정조사·성절사·천추사 등 각 사신 일행이 지날 때마다 그 규모에 따라 많은 부담을 안고 있었던 것입니다.

 

둘째, 고양지역은 세종 때 군사훈련장이 되었고, 연산군 때는 수렵장이 되었습니다. 세종 30년(1448) 혜음산(惠陰山)·대자암산(大慈庵山)·말질산(末叱山)을 강무장으로 삼아, 이 일대를 사냥 금지구역으로 지정하였습니다. 일단 강무장으로 지정하면 사냥금지는 물론 벌목까지 금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그렇게 하면 인근 주민들의 생업에 막대한 지장을 준다는 세종의 배려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군사훈련 때 어가를 따르는 수많은 관료와 병정들이 동원되므로, 벼와 곡식을 밟는 등 폐단이 적지 않았습니다. 연산군이 즉위하면서 군사훈련을 핑계로 날마다 사냥으로 세월을 보내자, 서울 인근의 고을들의 피해는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첫 대상이 고양지역이지요. 즉, 연산군 말년의 잘못된 정치로 백성들까지 정치에 대해 비판하고 임금을 욕하였는데, 마침 광주(廣州)와 고양 사람이 무도한 말을 했다고 하여 능지처사(陵遲處死)하고 가산을 적몰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연산군에게 이 지역을 사냥터로 만들고자 하는 의도에 좋은 구실을 주었지요.

연산군10년(1504) 4월 의정부·육조·한성부·사간원·사헌부·홍문관 관원을 불러 광주와 고양의 혁파를 논의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대신들은 선왕의 능침이 있는 광주와 고양은 혁파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임금을 욕하던 죄인이 살던 지역만 떼어 다른 고을로 붙이고 두 고을은 그대로 두자는 타협안도 나왔으나, 결국 혁파되고 말았습니다. 같은 해 8월에는 고양을 사냥터로 만들면서 금표(禁標)를 세워 그 구역을 정하였으며, 관아의 곡식을 파주로 옮겼습니다. 그리고 연산군 11년 7월에는 금표 지역을 더욱 확대하였습니다. 즉 동북으로 광주·양주·포천·양평에서, 서남으로는 파주·고양·양천·과천·통진·김포에 이르는 지역에 금표를 세우고, 지역 주민 500여 호를 쫓아내고 내수사의 노비를 옮겨 살게 하였습니다. 따라서 지역 주민들은 생업을 잃고, 금표 밖의 사람들도 땔감을 하기 위해 금표를 범하게 되면 죽임을 당하니, 가만히 있으면 굶어 죽고 움직이면 베어 죽는 형편이 되었다고 합니다.

 

셋째, 고양지역은 한양 도성의 서북쪽 외곽에 위치하여 왕릉을 비롯한 권문세가의 묘역으로 더할 수 없는 좋은 위치였습니다. 고양은 도성에서 100리 내에 왕릉을 마련하게 되는 예에 따라 양주·광주·김포 등과 더불어 그 대상이 되었으며, 입신양명의 기회와 과거 등 각종 정보를 쉽게 획득하기 위한 여건이 좋은 곳이었기 때문에 권문세가들은 묘역과 사당을 마련하고 정착하기도 하였습니다. 고양의 능묘는 양주의 동구릉 다음으로 큰 왕릉군(王陵群)을 형성하고 있는 서오릉과 서삼릉이 있으며, 소현세자의 소경원(昭慶園)과 성녕대군(誠寧大君) 묘 등을 비롯하여 왕자·빈·후궁·왕녀들의 묘가 수십 기 흩어져 있어 왕실 가족묘지 같은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그리고 권희(權僖), 이무(李茂), 신광한(申光漢), 황치신(黃致身), 김주신(金柱臣), 김명원(金命元), 민순(閔純) 등 조선시대 명신들의 묘역 수백 기가 자리하고 있지요. 한편 이들을 모신 사당은 교육기관으로 기능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따라서 고양향교와 더불어 행주서원·문봉서원·송산재(경모재) 등이 마련되어 그들을 중심으로 유교적 사회질서를 운용하였던 것입니다.

 

넷째, 고양은 임진왜란 때 왜군을 크게 무찔러, 한강 이남으로 물러나게 하는 계기를 만든 행주대첩의 현장이었습니다.

1593년 2월 전라도관찰사 권율(權慄)을 지휘관으로 하여 행주산성(幸州山城)에서 왜군을 크게 무찔렀습니다. 권율은 조·명 연합군이 평양을 수복한 뒤, 남쪽으로 내려온 명나라의 원군과 호응해 서울을 되찾기 위해 관군을 이끌고 북상하였습니다. 북상하던 중 수원 독산성(禿山城)에서 일본군을 격파한 후, 군대를 서울 근교 서쪽 행주산성으로 옮기고, 조방장 조경 등과 함께 목책(木柵)을 세워 은밀히 군사를 옮기고 진지를 구축하였습니다. 이때 승장(僧將) 처영(處英)이 의승군(義僧軍)을 이끌고 권율을 따라 강을 건너니 병력은 약 2,300여 명이 되었습니다.

당시 왜군은 7개 부대로 나눠 행주산성을 공격하였습니다. 이 때 왜군 병력은 3만여 명이었다고 하지요. 관군은 왜군의 공격으로 한 때 동요했으나 권율의 독려로 힘을 얻어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었습니다. 또 서북쪽 자성(子城)을 지키던 승군 한 귀퉁이가 뚫려 위급한 상황에 이르기도 하였으나 백병전과 투석전으로 사력을 다하였으며, 부녀자들까지 동원되어 관민이 일치단결해 싸웠습니다. 특히 부녀자들은 긴치마를 잘라 짧게 만들어 입고 돌을 날라 열세한 무기를 보완하고 적에게 큰 피해를 주었습니다. 여기에서 ‘행주치마’라는 이름이 생겨났다고도 하지요.

성안에 무기와 군인이 부족한 상황을 눈치 챈 적군이 기세를 올리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마침 경기수사(京畿水使) 이빈(李贇)과 충청수사 정걸(丁傑)이 화살 수만 개를 실은 배 두 척을 몰고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방포하면서 적의 후방을 칠 기세를 보였습니다. 이에 당황한 적은 물러나고 말았지요.

이것이 유명한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행주대첩입니다. 명(明) 제독 이여송은 평양으로 회군하던 중 행주대첩의 소식을 듣고 벽제관에서 패하고 급히 회군한 것을 후회했다고 합니다. 한편 벽제관 북쪽으로 혜음령(惠陰嶺)과 동북쪽에 퇴패치(退敗峙)가 있으며, 서남쪽의 도로와 이어져 있는 공간은 명나라 이여송 군사가 왜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바로‘벽제관전투’의 중심지가 됩니다.

 

다섯째, 고양지역은 조선시대 한양 도성을 지키는 외곽지역으로서 북한산성이 축조되었고, 행궁을 비롯한 각종 시설이 마련되었습니다.

북한산성은 고양시 남동쪽과 서울 북쪽에 병풍처럼 둘러쳐 있는 북한산에 위치해 있고, 사적 제162호로 지정되었습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경기도 고양시와 서울특별시 은평구·종로구·성북구·도봉구와 경계를 이루고 있지요. 한양 도성의 북쪽에 위치한 북한산은 오래전부터 백제의 도읍지를 선정하는 성스러운 곳이었고, 또한 지금까지 전해지는 신라 진흥왕순수비가 있어서 삼국시대에 서로 힘을 겨루던 곳임을 알 수 있습니다. 북한산은 서울의 진산(鎭山)으로, 조선 태조 2년에는 호국백(護國伯)에 봉해져 나라의 제사를 받는 명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원래 북한산이란 이름은 산 이름이 아니라,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설치한 9주 5소경의 하나인 한산주(漢山州)에서 보듯이 오늘날 서울 일대를 가리키는 지명이었으며, 한산의 북쪽 지역이라는 뜻에서 북-한산, 남쪽 지역이라는 뜻에서 남-한산이라 하던 것이 그 지역을 대표하는 산 이름(북한-산, 남한-산)으로 바뀐 것입니다. 우리나라 지명에 ―산·―주·―천의 이름은 가장 일반적인 고을이름 형태이지요.

북한산에는 북한산성이 축조되었고, 조선의 도읍지 한양에는 한양도성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탕춘대성(蕩春臺城)이 북한산성과 서울성곽을 연결하고 있으며, 미완의 탕춘대성은 북한산성이 지나는 보현봉에서 형제봉으로 이어져 북악과 연결시켜 도성에 잇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이렇듯 북한산에서 뻗어나간 자연 산세를 이어 3개의 성이 축조되어 한성 도읍지가 천하에서 으뜸가는 관방 요새가 되도록 설계되었던 것입니다.

북한산은 최고봉인 백운대를 비롯하여 모두 32개 산봉우리로 이루어졌습니다. 인수봉·만경대 등 빼어난 암봉들이 험준한 산세를 이루고 있어 태조 이성계가 북한산을 진산으로, 백악을 주산으로 삼아 한양에 도읍을 정하였던 것입니다. 그 이전 북한산 아래 우이·도봉동 일대는 북한산 연봉을 뒤에 지고, 동쪽의 불암산을 마주 대한 사이에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어 지리적 조건이 고대국가의 도읍지가 될 만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려 숙종 6년(1101)에 남경 건설을 계획하며 대신과 풍수지리가들을 지금의 서울 부근으로 보내서 남경을 건설할 만한 곳을 찾아보게 하였는데, 이때 북한산 아래가 도읍지로 주목받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고려시대 거란의 침입으로 태조 왕건의 재궁(관)이 북한산 향림사(향로봉 남서쪽 기슭으로 추정)로 피난하기도 하였고, 몽고군과의 격전지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우왕 때에는 왜구의 침략에 대비하여 중흥동에 석성을 쌓고 왕실을 피신시키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지금 남아 있는 북한산성은 조선 숙종 37년(1711)에 축조된 것입니다. 임진왜란 때 도성을 적에게 내어준 것과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저항하다가 치욕적인 항복을 당한 역사에서 효종이 북벌계획을 구상하였으나, 그가 재위 10년 만에 세상을 떠나 그 계획이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그 후 숙종 즉위년(1674)에 북한산성을 축성하자는 의견이 제안되었습니다. 그러나 축성 반대론도 적지 않아 미루어지다가 군사요청이 없자 논의가 진행되지 않았지요. 숙종 17년(1691)에 강화(江華)에 축성공사가 시작되면서 같은 해 11월에 비변사에서 북한산에 축성할 것을 청하고, 12월에는 축성의 이해관계를 의논하였으나 강화의 축성이 끝난 후 논의하기로 다시 미루어졌습니다. 이후 여러 차례 축성론이 다시 일어났으나 반대론에 밀려 연기되곤 하였습니다.

축성을 반대하는 이유는 기근과 재난 등으로 경제여건이 좋지 않다는 것, 풍수지리상 도성의 지맥을 손상시킨다는 것,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 맺은 약조에서 축성이 금지되었다는 것 등이었습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점은 도성 가까이 산성을 축조하면 도성과 산성을 동시에 방어하여야만 실효가 있는데, 두개의 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군사력이 부족할 것이고, 도성을 버리고 산성으로 피난하여 저항한다면 도성 내의 백성이 갈 곳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장기간 논의가 거듭되던 중 숙종 29년(1703) 3월에는 우의정 신완(申琓)이 북한산성을 축성할 것을 강력히 청함에 따라 북한산성을 수축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러나 반대하는 상소와 건의가 많아 주춤거리게 되었고, 숙종 30년(1704) 2월에는 북한산성에 앞서 도성을 수축키로 결정하였고, 숙종 36년(1710) 10월 11일에 도성의 역사가 준공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도성 수축이 끝나자 북한산성 축성 논의가 재개되었습니다. 훈련대장 이기하(李基夏)가 왕명으로 북한산에 다녀와 보고하면서 축성할 것을 청하였으나 도성 역사가 끝난 직후이므로 보류되었습니다. 그런데 숙종 36년 9월에 청나라에서 해적의 피해를 입고, 가까운 연해 지방의 방어에 유의하라는 외교문서가 조선에 전해졌습니다. 이로써 병자호란 후 맺어진 약조에 의해 성곽 수축을 금지한 내용이 소멸되었고, 청나라에서 외교문서를 전달할 정도이니 방비대책을 강화해야 한다는 의견이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같은 해 11월과 12월에는 북한산성 축성 논의가 활발해지고, 숙종 37년(1711) 2월에는 축성하기로 결정하고, 4월 3일에 착공하기에 이르렀으며, 6개월의 공사로 10월 19일에 7,620보(步-21리 60보)의 거대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이 공사는 훈련도감·금위영·어영청의 3군문이 담당하였고, 그 아래 각 군문에는 책임 감독관으로 낭청(郞廳)을 두었습니다. 축성에 필요한 노동력은 3군문 군사는 물론 서울 주민이 동원되었고, 그밖에 모역군(募役軍)과 각종 공장(工匠)이 동원되었습니다. 서울 주민은 경상가(卿相家) 이하 각 호(戶)를 대·중·소로 구분하여 대호는 3명, 중호는 2명, 소호는 1명씩 식량을 지니고 공사에 나섰으며, 모역군은 한 달에 쌀 9두와 면포 2필씩이 지급되었습니다. 그리고 화엄사의 승려 성능(聖能)이 이끄는 승군도 동원되었습니다. 이때 이룩된 것이 우리가 볼 수 있는 북한산성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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