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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시의 문화유산 조선시대 첫 번째 이야기 류구 선생 묘(1398)

지 정 번 호 : 향토문화재 제30호

소 재 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신동 산106-8

 

류구 선생 묘(柳玽 先生 墓)는 행신동 무원마을 진주 류씨 묘역 내에 있으며, 부인 덕수 이씨(德水 李氏)의 묘와 합장되어 있습니다. 특히 고졸한 글씨체로‘대학사(大學士)’이라고 쓰인 표석과 소박한 조각법의 합장한 석인은 다른 분묘에서는 보기 어려운 특이한 것으로 원래부터 설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요.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고려공양왕릉의 석인과 비슷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두 손을 앞으로 모은 모습은 참 특색있지요. 조선시대의 무덤이지만 초기인지라 고려시대의 석물조형양식을 많이 보이는 것이겠지요? 한편 비와 다른 석물 중의 일부는 조선 중기 이후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나중에 조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류구는 고려 충숙왕 3년(1335)에 태어나 조선 태조 7년(1398)에 돌아가셨습니다. 조선조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으로서 진산군(晋山君)에 책봉되었으며 세종대에 청백리로 추록된 인물이지요. 현재 이곳의 진주류씨 묘소 가운데 가장 전대(前代)에 해당하는 인물로 시호는 정평공(靖平公)입니다.

  아래의 사진들은 류구선생묘 사진이고요. 맨 아래 사진은 고려공양왕릉 석인의 사진입니다. 비교해서 보시면 재미있어요^^

 

고양시의 문화유산 조선시대 두 번째 이야기 권희 선생 묘(1405)

지 정 번 호 : 향토문화재 제38호

소 재 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성사동 산60-6

 

권희 선생 묘(權僖 先生 墓)는 원당 전철역 남쪽의 성사동 불당골 마을 안에 진한국대부인한씨(辰韓國大夫人韓氏)와 합장되어 위치하고 있습니다. 묘소에는 묘비, 장명등, 상석, 고석, 향로석, 문인석 2쌍이 있으며, 최근에 오석의 비석과 망주석 1쌍, 문인석 2쌍을 그 앞쪽에 갖추어 놓았습니다.

봉분은 본래 고려조․조선조 초기의 보편적인 사각묘였으나 현재는 새로이 단장하여 옛 모습이 변형되었어요. 봉분 앞에 세워진 화강암 재질의 묘비는 높이 83cm, 폭 33cm, 두께 14cm의 규모인데 묘비의 윗부분은 다듬어 마름모꼴로 만들어 세웠어요. 이런 형태의 묘비는 조선 초기에 많이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쉽게 보기 어렵습니다. 묘비의 앞면에는‘조선정승정간공 권희지묘 진한국 대부인 한씨 장(朝鮮政丞靖簡公 權僖之墓 辰韓國大夫人 韓氏퉿葬)’이라 표기되어 있으며 뒷면에는‘정통기사’라 기록해 세종 31년(1449)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묘비의 우측으로는 높이 127cm의 장명등이 위치해 있는데 화창은 두 개로 옥개석의 조각 수법이 뛰어난 작품입니다. 구조는 사각의 화사석 위에 사각형 옥개석을 얹은 형태입니다. 장명등의 반대편에는 또 다른 석물이 보이는데 장명등의 부재로 판단됩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현재 서있는 장명등이 세워지기 전에 있었던 원래의 장명등일 가능성이 있겠지요. 비슷한 부재가 고려공양왕릉에서도 보입니다.

상석, 고석, 향로석 좌우에 세워진 문인석은 15세기 중엽에 세워진 것으로 보입니다. 총높이 110cm에 관모를 쓰고 홀을 두 손으로 받쳐든 조선조 전기의 일반적인 형식을 갖추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몸에 비해 머리 부분이 크며 홀과 턱이 일정하게 떨어져 있고 땅속에 묻힌 부분과 아래 쪽이 왜소해지는 점 등이 조선조 전기의 문인석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지요. 문인석의 얼굴에서는 눈이 크고 광대뼈가 불룩 튀어나와 험상굿은 모습으로 보이며 팔굽에서 수평선 윗쪽으로 굽혀진 손의 처리가 깊은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묘소 주위에는 이밖에 최근에 세워진 문인석과 신도비 등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권희 선생 묘는 이 시기에 만들어진 무덤들에서 많이 보이는 풍자적이고 다양한 표정을 볼 수 있는 재미있는 유적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권희는 고려말 조선조 전기의 문신으로 충숙왕 6년(1319)에 출생하여 조선조 태종 5년(1405)에 사망한 인물입니다. 본관은 안동으로 검교시중 고의 아들이며 조선조 전기의 대학자이며 정치가인 양촌 근의 아버지가 됩니다. 음보로 관직에 기용되어 홍주도병마다 등 여러 벼슬을 거쳐 문하찬성사에 이르러 영가군에 봉해졌고 조선조에 들어와 태조 2년(1393) 검교문하시중으로 개국원종공신이 되었답니다.

  권희선생묘 사진입니다.

 

 

 

 

 

 

 

 

 

 

 

고양시의 문화유산 조선시대 세 번째 이야기 - 혼일강리역대국지도 들어보셨죠? 이무 선생 묘(1408)

지 정 번 호 : 향토문화재 제9호

소 재 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주교동 산75

 

이무 선생 묘(李茂 先生 墓)는 주교동 영글이산 기슭에 위치하여 배(配) 정경부인(貞敬夫人) 해평 윤씨(海平尹氏)와 계배(繼配) 정경부인(貞敬夫人) 능성 구씨(綾城具氏)가 합폄(合窆)되어 있는 사각묘(四角墓)로 석대(石帶)가 돌려져 있습니다.

묘 앞의 석물로는 상석 외에 석양(石羊) 문인석, 장명등, 망주석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정조(正祖) 9년(1785)에 건립된 백대리석(白大理石) 묘갈(墓碣)의 비문은 윤득관(尹得觀)이 지었고 글씨는 이의현(李義玄)이 썼습니다. 높이는 138cm, 높이 174cm의 오석(烏石)으로 만들어져 있지요. 또한 신도비 옆에는 1976년에 후손들이 건립한 영모비(永慕碑)가 있는데 귀부와 이수를 갖추고 있습니다.

이무는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자(字)는 돈부(敦夫)이며 호(號)는 중정(中亭)입니다. 본관은 단양(丹陽)으로, 판서 거경(居敬)의 아들이죠. 고려 공민왕(恭愍王)때 문과급제(文科及第)를 하여 관직에 올랐으나, 우왕(禑王) 때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로 있으면서 유배가 있던 조영길(趙英吉)이 도망한 것을 알면서도 아뢰지 않아 파직되었으며, 공양왕(恭讓王) 때에는 권신(權臣) 이인임(李仁任)의 일파라하여 곡주(谷州)에 유배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1390년 전라도 도절제사로 왜구를 격멸할 때 무려 70여 급이나 참하여 논공행상 시 왕으로부터 의주(衣酒)를 하사받았으며 그 공적을 영구히 기리기 위해 그의 주둔지였던 주계(朱溪)를 그의 이름 중‘무(茂)’자를 따서 개칭하였는데 오늘날 무주군(茂州郡)이 바로 그곳입니다. 조선 개국 후 태조(太祖) 2년(1393) 개성유(開城尹)을 거쳐 중추원사(中樞院使)가 되어 서가(西江), 및 강화도(江華島)의 병선(兵船)을 점검하는 등 국방문제에 주력하였습니다. 태조 5년(1396)에 도체찰사(都體察使)가 되어 일기도(壹岐島)와 대마도(對馬島)의 왜구를 토벌하였다고 합니다. 2년 뒤 제1차 왕자(王子)의 난(亂)때는 참찬문하부사(參贊門河府事)로 있으면서 방원(蒡遠)을 도와 정사공신(定社功臣) 1등으로 단산부원군(丹山府院君)에 피봉(被封)되었습니다. 그 후 판삼군부사(判三軍府事)를 거쳐 좌명공신(佐命功臣) 등으로 우정승(右政丞)에 승진, 이어 영승추부사(領丞樞府事), 우정승 겸 판병조판사(右政丞兼判兵曹判事)를 역임하였습니다. 태종 8년(1408) 병(病)으로 사직하였으나 민무구(閔無咎)의 옥사에 연루되어 창원(昌原)에 유배되었다가 죽주(竹州)로 이배(移配) 도중 괴한들에 의하여 피살(被殺) 당하였습니다.

이분의 업적은 또 있습니다. 김사형(金士衡), 이회(李薈)와 함께 지리적 지식을 수집하여 [혼일강리 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일본 용곡대학에 소장, 길이 171cm, 폭 164m의 채색필사도)를 제작한 것이지요. 이 지도는 세계최초로 제작된 세계지도라는 큰 의미가 있는데요. 이 지도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볼까요?

 

혼일강리역대국지도

혼일강리역대국지도는 태종 2년(1402)에 제작된 지도로써 권근의 문집「양촌집」에 의하면 중국의 「성교광피도」와 「혼일강리도」를 중국에서 들여와 우리나라와 일본을 추가한 지도라고 합니다.

이 지도를 살펴보면 모양이 약간 찌그러진 듯 하지만 매우 자세하게 그려진 지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강과 두만강, 대동강 제주도 등이 빠짐없이 그려져 있지요. 지금으로부터 600년전에 제작된 지도 중에서 이렇게 자세한 지도는 많지 않답니다. 다만 중국과 조선이 비정상적으로 크게 그려져 있다는 점이 문제라면 문제겠지요. 하지만 당시에는 몰랐던 아메리카와 오세아니아를 빼면 거의 모든 세계가 그려져 있습니다. 인도, 아라비아반도, 아프리카, 유럽 등 현실적으로 그려져 있지요.

아쉬운 점이라면 우리나라에 이 지도가 없다는 점일 텐데요.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일본으로 넘어간 것이 아닐까 추정된답니다. 참 안타깝지요?

이렇게 이무 선생은 여러 방면에서 다양한 이력을 남기고 고양시에 잠들어 계시답니다. 어떤가요. 이 한적하고 조용한 무덤이 새롭게 보이시지는 않나요? 

오늘날 이 지도에 대해 지리학계에서 많은 논문이 나오고 있으며, 콜롬버스가 아메리카대륙을 발견하기보다 90년 전에 제작됐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이 지도에 권근(權近)의 발문이 실려 있는데 『양촌집(陽村集)』22권에 실려 있는 발문의 일부를 우리말로 옮겨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천하는 대단히 넓다. 안으로는 중국에서부터 밖으로는 사해에 이르기까지 몇 천만 리인지 모른다. 지도는 두어 폭의 종이에 약하여 그리는 관계로 상세하게 함이 극히 어렵다. 그러므로 지도는 모두 소략되어 있다. 오로지 오문(吳門) 이택민(李澤民)의 성교광피도(聲敎廣被圖)는 지도가 매우 상세하고 역대 제왕의 국도연혁은 천대승(天臺僧) 청준(淸濬)의 혼일강리도(混一疆理圖)에 잘 갖추어져 있다.

태종 2년(1402) 여름 좌정승 상락(上洛) 김사형(金士衡), 우정승 단양(丹陽) 이무(李茂)는 나라 다스리는 여가에 이 지도를 참고하고 연구했다. 그리고 이회에게 상세히 검사할 것을 명하고 다시 상교(詳校)를 가해서 지도 하나로 합치게 했다. 요동 이동과 본국 강역은 이택민의 지도에도 역시 많이 빠져 있었다. 지금 특히 본국 지도를 증광하고 일본도를 첨부하여 힘겹게 새 지도를 만드니 정연함이 볼만하다. 진실로 문 밖에 나가지 않고도 천하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지도를 보고 지역의 멀고 가까움을 아는 것은 또한 다스리는데 도움을 주기 위함이다. 두 공(좌정승 김사형, 우정승 이무)이 지도에 대하여 마음 깊이 생각함에 그 규모와 국량(局量)이 큰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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