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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끝자락에 접어드니 벌써부터 선선한 가을바람이 기다려오는 요즘 그동안 더위핑계로 미루었던 걷기여행을 나섰습니다.

비가 오락가락 하는 틈을 타서는 더위가 다 갔겠거니 안심을 하며 집을 나섰던 상쾌한 마음과 달리 아직은 여름이었던 걷기여행은

더위와의 사투였고, 간간히 뿌리는 비로부터의 도피였었답니다.

전국 어디를 가나 그 지역을 대표하는 걷기 코스가 개발되어있어 웰빙문화를 선도하고 있는 요즘인데요, 고양시를 대표하는 길이 행주누리길, 서삼릉 누리길, 고양동 누리길, 송강누리길, 고봉누리길의 5구간으로 개발된 고양 누리길이랍니다. 짧게는 1시간 30분부터 길게는 3시간 거리이지요.

두어번 걸어보았던 서삼릉 누리길에이어 2번째 코스로 선택한곳은 고봉누리길, 그 전날 오래간만에 안곡습지공원을 찾았다가는 고봉누리길의 시작점임을 확인하며 다음날 다시 찾은 길 이었답니다.

고봉누리길은 안곡습지공원에서 출발하여 영천사 - 고봉산 - 금정굴 - 황룡산 - 용강서원 - 삼감천마을로 이어지는 2시간 30분 코스로 난이도 중하라는 설명에 가벼운 마음으로 임했다가는 예상밖의 난이도에 온 가족이 바짝 긴장을 하기도 했던 날 이었지요

안곡습지공원 입구엔 고양 고봉누리길의 코스를 알리고 있습니다.
우리 가족으로 하여금 오늘의 일정을 만들어 주었던 바로 그 안내판 이었지요  

유치원생과 초등학생의 생태학습의 보금자리가 되어주고 있는 안곡습지공원을 지나 고봉누리길의 두번째 지점인 영천사를 향합니다. 

그곳에서부터 누리길이라고 하기엔 조금 버거운, 등산에 좀 더 가까운 오르막길이 시작이 됩니다.
고로,가벼운 걷기여행이라 생각했던 아이들은 초반부터 투덜투덜 말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잠깐이었음에도 예상치 못했던 오르막에 지쳤던 가족에게 첫번째 휴식처였던 공터였는데, 누리길 중간중간엔 이러한 체육시설을 갖춘 쉼터가 있어 걷기와 함께 심신 단련의 기회가 되어주기도 합니다.

누리길을 걷다보면 아직까지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과 마주하게 됩니다. 우리가 길을 걸었던 그날도 나란히 걷고 있던 대다수의 사람들은 고봉누리길은 모른 채 오랜 습관처럼 고봉산을 오르고 있던 사람들 이었으니까요. 

평소 운동부족이었다라는 것을 여과없이 확인이라도 시켜주는 듯 오래간만에 산에 오르는 아이들은 올라가다 쉬기를 반복합니다.

쉴 수 있는 공간만 나타났다 하면 자신들을 위한 자리였다라는 듯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습니다.
벌써 몇번째 휴식인지 ?. 미리 자리를 잡은 아이들을 핑계로 저 또한 가쁜숨을 몰아내고 있습니다.  

그 길을 오르다보면 곳곳에 이런 안내판이 보인답니다. 길을 걸으며 그 길의 역사를 만나는 스토리텔링이라 할까요.

고봉산에서 만난 이야기는 한주 미녀가 고구려왕을 맞이하기 위해 봉화를 올려 고봉산이 되었다라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한씨미녀이야기 였습니다. 

이번엔 군부대가 자리하고 있기에 오를 수 없던 정상의 길목에서 만난 이무기 바위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무기 바위다라고 알리는 이정표가 있기에 한번 더 쳐다볼 수 있었으니 그 글이 없었다면 당연히 그냥 지나쳐버렸을 모습입니다.

너무나 자상했던 이정표라 말할 수 있을듯 한데 어렵게 고봉누리길을 완주한 사람으로서 안타까웠던 사실은 조금은 억지스러웠던 이러한 이정표보다는 누리길의 방향을 알리는 이정표가 좀 더 많았으면 싶어집니다. 

시작부터 온 가족을 지치게 만들던 오르막길이 드디어 끝이 났나봅니다. 만경사와 영천사의 갈림길에서 내리막길이 시작이 됩니다.

옛 기억을 더듬어보니 내려갔다가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는 하는 만경사는 아주 작은 사찰이었기에 오늘은 생략하기로 하고 영천사로 향합니다. 

금방 마주하게된 영천사는 누리길 인줄 모르고 고봉산 등산을 하며 찾았던 그때의 기억 그대로의 아담하면서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작은 사찰입니다. 입구에서 시원한 약수 한 바가지로 목을 축이곤 사찰 관람을 하고 싶었지만 엄숙하게 49제를 올리는 가족이 있었든지라 혹시나 방해가 될까 싶어

서둘러 길을 재촉해야만 했습니다.

그럼에도 놓칠 수 없었던 풍경이 있었으니. 스님의 세심한 손길이 닿았을 것같은 꽃밭과 작은 규모의 암자에 비해 너무나 숫자가 많았던 장독들로 쉬이 시선을 거둘수가 없었답니다.

영천사의 뒷편으로는 아기자기한 돌탑이 시선을 끌고

앞쪽으로는 중산마을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그 너머로는 송포들판과 대화마을 자유로와 한강으로 이어진다는데 시야가 좋지 않았던 날씨였던지라 간신히 울창한 나무사이로 아파트 단지만 보입니다. 

 

 

그 길을 내려가다 돌탑을 만난 아이들은 그냥 지나치지 못한 채 소원을 담은 돌을 올린 후 마음을 빌어보기도 합니다.

그렇게 영천사를 지난 후 길은 계

속 내리막이었으오르막길을 오르며 숨 가빴던 기억은 벌써 옛 일이 되었습니다.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여유로운 대화마저 나눌 수 있었던 여유로움이 그렇게 잠깐 이어집니다.


헌데 그렇게 반갑고 편안했던 내리막길의 끝자락을 마주한 순간 어 ~ 이건 아닐텐데.  

영천산에서 내려다 보았던 바로 그 아파트 촌인 듯 큰길이 나타납니다.

앞으로 몇번을 번복하게 되었던 코스 이탈의 첫번째 지점이었지요. 고봉산을 넘어 황룡산으로 이어지는 코스를 찾았어야 했는데 내리막길이 그저 반가워 아무 생각없이 내려와 버린 탓이었습니다.

찰라의 시간동안 이 지점에서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야하는 걸까. 아님 내려온길을 되돌아가야하는걸까. 오만생각이 교차를 합니다.

마음먹고 나선길 포기하기도 싫다. 그렇다고 시원하게 내려왔던 길을 다시 오르기도 싫다, 그렇다면 방법은 한가지 고봉산 누리길을 알리는 다음 코스에서 시작하자 결정을 하곤 황룡산 입구를 찾아나섰습니다.  

그리하여 평지를 걷기를 20여분 물어물어 황룡산의 시작을 알고 있던 입구에 도착을 하고 나니 과연 맞게 가는 것일까. 누리길을 알리는 이정표를 만날 수 있을까 걱정했던 마음이 눈녹듯 사라집니다.

그렇게 해서 고봉누리길을 이어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 길을 오르며 여유를 찾게된 마음으로 되돌아보니 내려오는 길에 누리길을 알리던 이정표를 만나지 못한 듯합니다.

코스를 개발하고 전해져오는 옛 이야기를 알리는 안내판을 설치하는 등 손이 많이 갔다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걷기위해 부러 그 길을 찾은 탐방객의 마음엔 2% 부족한 아쉬움 이었습니다. 

내려온 만큼 오르느라 헉헉 대던 가슴으로 처음 마주하게 된것은 1950년 6.25 전쟁중의 아픔을 이야기하고 있던 금정굴이었습니다.

이곳은 9.28 수복 당시 점령중인 북한군이 후퇴하자 부역자를 색출한다는 명분으로 부역자 가족들 남녀 노소를 비롯 억울한 사람들이 반공단체와 경찰에 의해 대량으로 집단 학살된 곳이었습니다. 실제 좌익 활동자는 월북한 후로 남아있던 사람들은 죄가 없어 피신할 필요가 없다라고 자부하던 사람들이 억울한 죽음을 당했던 현장으로 직도 그들은 뻘갱이 가족이라는 누명을 쓰고 살아가고 있다라는 사실을 알리고 있었습니다

예상치 못했던 장소에서 마주하게 된 슬픈 역사의 흔적은 온 가족의 마음을 쿵 내려앉게 만들었답니다. 

그러한 슬픔을 뒤로한 채 또 다시 산을 오르는길은 오락가락 하던 비도 그치며 이제는 한풀 꺾였다 안심했던 더위가 온 몸을 휘감으니 아이들의 발길은 자연스레 느려지고 앉을 곳만 나오면 자리를 잡고서는 일어날 줄을 모릅니다.

집에서는 별일도 아닌걸로 뚝딱뚝딱 다투던 아이들이 산에 오르면서 같은 마음이 생기었나봅니다. 너무도 다정하게 한 마음이 되어서는 전진할줄을 모릅니다.  

그 아이들을 일으켜서는 황룡산 정상을 향해 군부대의 경계를 따라 쭈욱 이어진 길을 걸어갑니다.

헌데 그도 잠깐 갈림길이다 싶은 지점에만 도착하면 이쪽일까 저쪽일까 심한 고민을 하게 됩니다.

앞에서 이미 큰 착오를 겪었던 탓이었지요. 의심을 하고보니 길은 더 많아보이고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은 더욱 잦아지고 있건만 그 길을 지나는 사람은 숫자가 적고 기다렸다 묻기를 반복하건만 누리길의 코스를 정확히 아시는 분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는 길을 잡았다가는 돌아오기를 두어번, 확신없는 길인만큼 걷는 재미도 반감된 채 고봉누리길을 알리는 이정표만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20여분을 걸었을까 전혀 정상같지 않은 모습으로 정상임을 알리고 있던 숯고개에 도착을 했습니다.
고봉산과 황룡산에 많은 참나무를 이용한 숯을 만들었다라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었습니다. 

오르는 길은 너무도 한적했건만 정상이라 할 수 있는 지점에 다다르고 도착하고 나니 꽤 많은 분들이 이미 도착해 있습니다.

그곳은 운동을 목적으로 고봉산을 오르신 분들의 회향지점이기도 했습니다. 그곳에서 이곳의 터줏대감이라 하는 백구를 볼 수가있었습니다.

버려진 유기견들이 산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라고 하던데 이 개 또한 그런 사연을 안고있는 개가 아닐까 싶어, 싸온 음식이라도 있으면 나누어 주고 싶은 마음인데 달랑 음료수 한병만 들고 온 빈손이 많이 미안해졌답니다.  

길을 잘못 들어서는 바람에 늦어졌고 , 힘들다 투정부리는 통에 쉬기를 반복했던 지라 예상했던 시간보다 늦어지며 배에서는 꼬르륵 꼬르륵, 이제부터는 하산길이다 싶어 서두르기로 합니다. 

헌데 웬걸, 그 길은 초입부터 난관을 예고합니다. 길이 험한것도 험했지만 오랜시간 인적이 끊긴 듯한 길의 모양새가 더욱 마음을 불안하게 만듭니다. 

이렇게 안전을 위한 로프가 설치된것을 보면 관리된 코스가 분명한데 중간 중간 부러진 나무가 방치되어있고, 쫓아도 쫓아도 쉼없이 달라붙는 모기떼들 까지 불안요소 또한 너무나 자주보입니다.

고개를 숙여 길을 통과하면서는 아 되돌아가야 하는것은 아닐까 심각한 불안이 엄습해 오기도 합니다. 
실제 걸었던 시간은 10분에서 15분 남짓되었을텐데 그렇게 이어진 길은 너무 길었고 험난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만났습니다. 등산객에서 수없이 물었던 용강서원의 이정표가 나타난것입니다.
아 맞는 길이었어 !. 

그렇게 험난했던 숲을 통과하고 나니 안도의 한숨이 절로납니다. 그제서야 목이 말랐다는 사실도 생각이 나구요. 

다시 이어지던 내리막길을 내려와서는

잠깐 이어지던 숲깊을 통과하고나니 

애타게 찾아 헤매었던 용강서원이 보입니다.

조선 태종때 함경도 함흥에 머물던 태조 이성계를 모시고자 문안사로 보내졌다 태조에 의해 죽임을 당한 박순과 함께 고려때 명장으로 귀주대첩에서 전공을 세운 충정공 박서의 위패가 함께 모셔진 서원입니다. 헌데 그 문은 굳게 잠겨 있어 관람은 할 수가 없습니다.

애타게 찾아온만큼 둘러볼 수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홍살문에서 서원으로 이어지는 길만을 바라본 채 걸음을 옮깁니다.

그리고 이어 고봉누리길의 마지막 지점인 상감천 마을에 들어섰습니다.

고봉누리길의 시작점이었던 신도시를 대표하고 있는 일산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전형적인 시골마을 풍경으로 완전히 대비되는 모습입니다.

6.7.KM 2시간 30분 코스 자동차로 달리면 15분여, 그 길을 지나오는데 3시간이 훌쩍 넘어갔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더딘 걸음사이로 힘들어 할때면 기운을 불어넣어주고, 투정을 부릴때면 달래어 주기도 하며 행복했던 길이었습니다.

같이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지점을 바라보았던 모습과는 다른 하나의 지점을 모두가 향해가는 길 , 그것이 바로 걷기가 가진 큰 매력이었습니다.

힘들었기에 더욱 기억에 남고 , 함께 걸었기에 더욱 즐거웠던 고봉누리길에 이어 본격적인 가을에 들어서면 고양누리길의 또다른 코스도 함께 하려합니다. 

글, 사진 이민숙 (소셜락커 두공주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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