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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ratorsim과 떠나는 문화유산답사(고양시 편) - 고양의 대표적인 의병장, 이신의선생의 묘와 이석탄장대비(1627 외)  고양시문화유산답사기 / 고양시의 문화유산 

2012/05/14 08:37  수정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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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의 대표적인 의병장, 이신의 선생 묘(1627)

 

지 정 번 호 : 향토문화재 제14호

소 재 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도내동 산32

 

이신의 선생 묘(李愼儀 先生 墓)는 고양시청에서 화전방향으로 이어진 69번 지방도로 도내동 서촌마을 입구인 도래울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묘는 정부인 경주 이씨(貞夫人 慶州 李氏)의 묘와 쌍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묘소에는 묘비, 상석, 향로석과 망주석, 문인석 각 1쌍이 있는데 대부분 최근 새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묘 좌측의 대리석 묘비는 영조 25년(1749) 7월에 건립한 것으로 높이 250㎝, 너비 60㎝, 두께 20㎝의 규모이며 비좌와 팔작지붕의 옥개를 갖추고 있습니다.

신도비는 이신의 선생 묘 앞에 위치해 있습니다. 신도비는 4면 각자(刻字)로 앞면 상당에 ‘증이조판서 문정공 석탄 이선생 신도비명(贈吏曹判書文貞公石石灘李先生神道碑銘)’이라 전자되어 있습니다. 비신을 꽂은 대좌는 비교적 보존 상태가 좋으며 비신은 흔히 볼 수 없는 애석으로 되어 있으며 전후좌우 4면에 비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비문은 작은 세서로 세겨져 있으나 비교적 뚜렷이 남아 있어 판독에는 큰 어려움이 없을 정도입니다. 비의 앞면에는 증 이조판서문, 좌측에는 정공석, 후면에는 탄 이선생신도, 우측에는 비명이라 새겨져 있습니다.

이신의(李愼儀)는 1551년(명종 6)에 태어나서 1627년(인조 5)에 사망한 조선 중기의 문신입니다.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경칙(景則), 호는 석탄(石灘)입니다. 형조판서 원손(元孫)의 아들이기도 합니다. 민순(閔純)의 문인이며 김장생(金長生)과도 친교가 있었습니다. 일찍이 어버이를 여의고 형으로부터 학문을 배웠으며, 1582년(선조 15) 학행으로 천거되어 예빈시봉사가 되었고, 이어 참봉·종묘서봉사 등을 지냈습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향군 300명을 거느리고 적과 싸워 공을 세웠는데, 행주대첩시에도 전력을 지원했다고 전합니다. 공로를 인정받아 사옹원직장에 올랐으며, 사재감주부·공조좌랑·고부군수 등을 지냈습니다.

1596년 이몽학(李夢鶴)의 난 때에는 직산현감으로 천안군수 정호인(鄭好仁)과 함께 8,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병사(兵使)에게 달려갔습니다.

1604년 괴산군수를 거쳐 광주목사(廣州牧使)·남원부사·홍주목사·해주목사 등을 역임하였습니다.

1617년(광해군 9) 광해군의 폭정으로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유폐하려는 데 대하여 이항복(李恒福)·정홍익(鄭弘翼)·김덕함(金德諴) 등이 극간하여 유배되자 그도 분연히 항소를 올렸다가 이듬해 회령으로 유배, 위리안치되었습니다. 그해 가을 북로(北虜)의 경보(警報)가 있어 변경일대가 불안하여지자 흥양으로 유배지를 옮겼습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풀려나와 형조참의·광주목사(光州牧使)를 역임하고, 1626년 판결사를 거쳐 이듬해 형조참판에 올랐습니다. 이해 정묘호란으로 왕을 호종하여 강화로 가던 도중 발병하여 인천에 체류하다가 수원 마정리에서 사망하였다고 합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고양의 문봉서원(文峰書院)과 괴산의 화암서원(花巖書院)에 제향되었습니다.

저서로 《석탄집》이 있습니다. 시호는 문정(文貞)입니다.

 

고양시의 문화유산 조선시대 쉰 번 째, 임진왜란 의병에 대한 기록, 이석탄 장대비(1740)

 

지 정 번 호 : 향토문화재 제39호

소 재 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도내동 48-1

 

덕양구 도내동 흥도초등학교에서 창릉천으로 연결된 도라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었던 비석입니다. 현재 장대의 주변지역은 원흥동보금자리주택지구로 개발되고 있으며, 장대비는 임시로 고양시청에서 보관하고 있습니다. 택지조성이 완료되면 다시 원위치로 이전시켜서 제 위치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

비의 앞면에는‘이석탄장대(李石灘將臺)’라 표기되어 있으며 뒷면에는‘선생임진기의병설대 후백사십구년경신동인립(先生壬辰起義兵設臺 後百四十九年庚申洞人立)’이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기록을 보아 이 장대가 세워진 곳이 이신의 선생이 의병을 일으켜 왜군과 접전을 벌인 장소임을 알 수 있으며, 1740년에 마을 주민들에 의해 건립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또 1755년 영조년간의 이석희 편 고양군지에도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서 왜병을 소탕했으며 그가 살던 곳에 장대가 있다”란 기록이 있습니다. 장대는 5cm의 기단과 비신이 합쳐진 1기이며 옥개석과 비두는 만들지 않고 윗부분이 아랫부분보다 약간 넓은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한편 도내동이라는 지명은 이 비석과 관련하여 만들어졌는데, 임진왜란 때 이석탄 장군이 도내리 뒷산에서 아군이 많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군사 100여 명을 데리고 며칠 동안 계속해서 산을 돌았다는 전설에서 도래울이라고 하다가 훗날 도내리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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