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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예사와 떠나는 문화유산답사 - 고양시편'을 다시 연재합니다. 이순신을 이어 삼도수군통제사로, 류형장군 묘(1615)  고양시문화유산답사기 / 고양시의 문화유산 

2012/05/07 08:48  수정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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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을 이어 삼도수군통제사로, 류형장군 묘(1615)

                                      지 정 번 호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0호

                                      소 재 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신동 698

 

임진왜란 때 크게 활약한 류형(1566~1615) 장군의 묘입니다. 봉분은 사성으로 둘러싸였으며, 봉분 우측에 묘비가 있고 봉분 앞에는 상석과 향로석이 갖추어져 있습니다. 상석 전방 좌우에는 문인석이 있습니다.

계미(癸未) 10월에 건립(建立)된 오석(烏石)의 묘표(墓表)는 옥개석(屋蓋石)이 있는 폭 42cm, 두께 21cm, 높이 132cm의 크기로 「선무원종일등공신(宣武原從一等功臣) 증대광보국숭록대부(贈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議政府領議政) 진산부원군(晋山府院君) 행가의대부삼도통제사(行嘉義大夫三道統制使) 충경유공형지묘(忠景柳公珩之墓)」라 새긴 표문(表文)은 이세찬(李世燦)이 썼습니다.

신도비는 묘소 아래 길 옆에 있는데, 원래의 비문은 이정구(李廷龜)가 짓고 김현성(金玄成)이 글을 쓰고, 김상용(金尙容)이 전액(篆額)을 썼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비는 이정구가 찬한 것을 정학교(丁學敎)가 글을 쓰고, 이남식(李南軾)이 전액하여 고종 11년(1874)에 다시 건립한 것입니다. 크기가 폭 75cm, 두께 47cm, 높이 173cm이며 옥개석(屋蓋石)이 있고, 비문(碑文)에는「증영의정보조공신(贈領議政補祚功臣) 봉진산부원군(奉晋山府院君) 시충경유공신도비명(諡忠景柳公神道碑銘)」라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류형(柳珩)은 류진동(묘소가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28호로 지정됨.)의 손자이자 류용(柳溶)의 아들인데, 류용 역시 정3품까지 오른 무관이었습니다.

류형은 어린 시절부터 그 호탕함이 남달랐던 것 같습니다. 안장도 없이 말을 타고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공부를 등한시하는 그를 어머니가 걱정하자

“사내로 태어나 어렸을 적에 비록 낙척(落拓)하여 지내더라도 장성하면 반드시 공업을 세워서 영화롭게 봉양할 것이니 걱정마세요.” 했다고 하니 그 호탕함을 알 만합니다.

15세가 되자 드디어 학문에 관심을 가지는데, 놀기 좋아하는 습관을 한순간에 버리고 열심히 공부했다고 합니다.

이후 류형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김천일(金千鎰)의 휘하에 들어가 강화에서 활약하였습니다. 2년 뒤인 1594년, 무과에 급제하였고 선조의 친유(親諭)에 감격하여, ‘진충보국(盡忠報國)’을 새기고 충성을 다하여 나라를 지킬 것을 다짐합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휘하에 들어가 수군을 재건하였고, 남해 앞바다의 전투에서는 명나라 제독 진린(陳璘)과 이순신을 곤경에서 구하였습니다. 이 때문인지 충무공 이순신은 류형을 특별히 아꼈는데,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성품이 청렴결백하고 애국심이 강하며 군사를 다루는데 능했기 때문입니다. 이후 이순신과 함께 여러 전투에 참가하여 한산도대첩 등에서 혁혁한 공을 올렸습니다.

정유재란의 막바지인 1598년 류형은 이순신 삼도수군통제사와 함께 ‘노량해전’에 참가합니다. 노량해전은 퇴각하는 왜군과 침략군을 응징하려는 조선군의 총력전이었는데, 양 측 모두 사력을 다해 싸운 전투였기에, 조선군의 승리임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이 순직하는 등 조선군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류형 역시 조선군을 진두지휘하다가 5발의 총탄을 맞았지만 살아남았습니다. 류형은 깨어난 후 이순신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슬퍼하였으며, 그의 뒤를 이어 노량해전을 승리로 마무리 지었다고 합니다. 류형이 이순신의 뒤를 이어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사연이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겨울에 (류형이) 부산첨사(釜山僉使)로 탁배(擢拜)되었으나 부임하기도 전에 경상좌도 수군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에 초수(超授)되었다. 한음 이공이 앞서 제독 유정(劉綎)의 진영에 있을 적에 일찍이 통제사 이공에게 비밀히 서신을 보내 묻기를,

「공의 수하로서 공을 대신할만한 사람은 누가 있습니까?」라고 하니, 말하기를,

「류모(柳某)의 위에 설 자는 없습니다.」라고 하였으며, 그 후에 또 물으니 다시 말하기를,

「충의담략(忠義膽略)이 세상에 그에 비할 자가 없으니 벼슬이 비록 낮으나 크게 쓸만합니다.」

라고 하였다.

한음이 돌아와서 조정에 아뢰어 마침내 이렇게 제수된 것이니 특별히 전공(戰功)에 대한 상으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경자년에 충청수사(忠淸水使)가 되었고, 신축년에 전라우도 수사(全羅右道水使)가 되었으며, 임인년에 특별히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품계가 올라 통제사에 임명되었다.

 

이순신은 류형이 자신을 이을 장군임을 알아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류형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끝난 후, 현장에서 느낀 군행정의 부조리를 정비하는데 총력을 기울여 군사들이 전투력 증강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합니다. 그는 특히 용병에 능하고, 통제영(統制營)의 기계설비와 회령·경성의 축성 등 적을 방어하기 위한 군사시설의 확립에 주력하였습니다. 1615년 5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으며, 전라남도 해남의 민충사에 제향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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