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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전 선생 묘(1523)

 

지 정 번 호 : 향토문화재 제12호

소 재 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흥동 산40-1

 

김전 선생 묘(金詮 先生 墓)는 원흥동 송현마을 원흥교회 뒤편 절골 골짜기에 남향하여 위치하고 있습니다. 상석에는 광무 10년(1906) 새로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구요. 묘 앞에는 상석, 향로석, 장명등이 있으며 좌우에는 망주석과 문인석이 각 1쌍씩 배치되어 있는데 상석, 향로석, 문인석은 최근의 것입니다. 묘소의 우측, 망주석 뒤편에 신도비가 있습니다.

신도비는 장방형의 화강암 비좌, 비신과 화강암의 이수를 갖추었는데‘김충정공신도비(金忠貞公神道碑)’란 전자가 뚜렷합니다. 비문은 영의정 신흠(申欽)이 짓고, 김규(金珪)가 전서하여 광해군 3년(1611) 6원에 세워졌습니다. 대좌는 화강석으로 만든 장방형이며 비신의 비문은 매우 심하게 마모되어 있습니다. 보기 드문 수작으로 여겨지는 이수는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중앙에 두고 좌ㆍ우에 새겨져 있습니다. 이중 좌측의 용은 여의주 밑에서 오른발로, 우측의 용은 여의주 위에서 오른발로 움켜쥐려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곳에서는 비신과 이수 사이에서 규약을 뚜렷이 볼 수 있답니다.

김전(1458~1523)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연안, 자는 중륜(仲倫), 호는 난헌(懶軒)입니다. 할아버지는 내자시윤 김해이고, 아버지는 지중추부사 김우신(金友臣)이며, 어머니는 지청풍군사 이계충(李繼忠)의 딸입니다.

성종 3년(1472) 진사가 되었고, 1489년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 예안현감·홍문관 수찬을 역임하였습니다. 성종이 유신들에게 피폐한 고을의 수령으로 부임하도록 했을 때 예안 현감이 되어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이 생사당(生祠堂)을 세우기도 하였습니다. 연산군 2년(1496) 신용개(申用漑)·김일손(金馹孫) 등과 함께 사가독서한 뒤 전한이 되었으며, 춘추관 편수관을 겸해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습니다.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파직당했다가 1501년 부호군으로 다시 서용(敍用)되었습니다. 1504년 성균관 대사성에 올랐으나 갑자사화로 다시 좌천되었습니다. 중종반정 뒤 예조 참판 겸 동지경연사로 승진되었으며, 이어 이조 참판·호조 참판·대사헌 등을 역임하였습니다. 조광조(趙光祖) 등의 사림파가 득세한 1513년에서 1519년 사이에 지중추부사·우참찬, 이조·형조·예조·공조의 판서, 한성부 판윤·우찬성 등을 역임하면서 현량과의 설치 등 사림파의 개혁 정치에 반대론을 전개하였습니다.

1518년 찬집청 당상으로 신용개·남곤 등과 함께 『속동문선』을 편찬해 왕에게 올렸습니다. 1519년 판중추부사가 되었으며, 남곤·심정 등과 함께 기묘사화를 일으켜 조광조 등 사림파를 축출하고 정권을 장악하였습니다. 그 공로로 원종공신이 되었으며, 우의정을 거쳐 1520년 영의정 겸 세자사가 되었습니다. 항상 청렴결백하고 문장도 잘했으나, 기묘사화를 일으킨 배후 인물로 지목되어 후세에 많은 비난을 받았습니다. 시호는 충정(忠貞)입니다. 그럼 그의 일대기를 다룬 신도비의 내용을 마지막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상공의 벼슬 지내시고、장수를 누리셨네。

이미 그 복을 누리시고 또 후세에 남기시어。

태임(太任)、태사(太姒)를 낳으시니 한 나라의 어미시라。

오직 선함은 보답이 있노니 공께서 받으셨네。

거북 좌대 용머리의 묘도(墓道)더 더욱 빛나노니。

글쓰고 명 지어 새겨서 거짓 없이 보이노라。

숭정대부(崇政大夫) 행예조 판서(行禮曹判書) 겸 영춘추관사(兼領春秋館事) 동지경연 성균관(同知經筵成均館)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신흠(申欽)은 짓는다。

만력(萬曆) 39년(1611) 6월 일 세움。성균관 진사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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