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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 고양 명나라 궁녀 굴씨

 

황금희 (고양소식 편집위원)

 

내가 사는 동네, 내가 서 있는 이 자리는 무관심하게 지나치면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지만, 찬찬히 짚어보면 수많은 이야기가 살아있다. 마을마다, 거리마다, 살아 숨 쉬는 고향 이야기를 나누는 지면을 마련했다. <편집자 >

 

붉은 무덤의 여인, 명나라 궁녀 굴씨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기슭에는 명나라 마지막 궁녀인 굴씨의 묘가 있다. 맞은편에 있는 최영장군의 묘처럼 마음의 한이 풀리지 않은 탓인지 풀이 자라지 않는 붉은 무덤이다.

 

굴씨는 병자호란 때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잡혀갔던 소현세자가 데리고 온 9명의 명나라 환관, 궁녀 중 한 사람이다. 소현세자는 귀국한지 두 달 만에 의문사 한다. 청나라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소현세자가 청과 짜고 자신을 해하려 한다고 위협을 느끼고 있던 인조는 소현세자가 죽자 서둘러 동생 봉림대군(효종)을 세자로 책봉한다.

 

소현세자가 죽고 난 뒤 청나라는 함께 왔던 9명에 대한 환국령을 내리지만 굴씨는 떠나지 않았다. 본래 명나라 궁녀였던 굴씨는 오랑캐인 청나라에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하며 조선에 남았던 것이다.

 

굴씨는 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 조씨를 모셨다가 세자를 여읜 뒤 여승이 되어 자수원(慈壽院)에서 지냈다. 이후 소현세자의 손자 임창군을 보살피다가 죽었다. 그녀는 늘 중국 쪽을 바라보며 명나라 황후의 은덕에 감사해 했고, 청나라와 여진족을 얘기할 때마다 분노에 찬 얼굴을 지었다.

 

효종 때에는 명나라 황실에서 익혔던 상투 트는 방법 등 정통 예법을 조선 왕실에 가르쳐 그것으로 본을 삼기도 하였다고 한다. 효종의 북벌 계획을 알고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으나 결국 북벌을 보지 못한 채 70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굴씨의 묘가 고양시 대자동에 자리 잡게 된 까닭은 하며 다음과 같이 유언을 남겼기 때문이다.

 

오랑캐는 나의 원수요. 내 생전에 오랑캐의 결말을 보지 못하고 죽게 되었지만 행여라도 북벌하러 가는 군대가 있다면 내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켜볼 것이니 내가 죽거든 서쪽 교외 길가에 묻어주오

 

굴씨는 외모와 재능이 모두 남달랐던 거 같다. 특히 비파를 잘 타서 스스로 고향을 생각하는 노래를 지어 연주했다고 한다. 새와 짐승을 길들이는 재주도 있어 조선에 보급하기도 했다. 이런 재주 때문인지 굴씨에 대한 조선 지식인들의 관심은 남달랐다. 선비 신진유는 굴씨사를 남겼고, 시인 신위은 숭정궁인 굴씨 비파가, 선비 김구는 굴씨 묘를 지나며라는 시를 남겼다. 특히 추사 김정희의 제자이자 당대의 빼어난 시인인 신위의 시는 굴씨의 비파 솜씨를 가늠하게 한다.

 

 

비파를 타는 여인

 

장렬왕후 궁녀 가운데 제일로 꼽혀

만수전 봄빛에 활짝 피었네

터져 나오는 소리는 은혜와 원한의 긴 여운

바람모래 부는데 비파 소리가 전각을 감도네

신령스런 솜씨, 옛 명인들을 감복시키고

눈물 고인 눈, 함께 온 고국 사람 바라보네

비파를 안고 무릎에 놓은 채 몸에서 떼지 않았으니

미인은 흙이 되어도 악기에 밴 향기 남았네

 

시인 신위(申緯, 1769-1845)의 시, 숭정궁인굴씨비파가(崇禎宮人屈氏琵琶歌)

 

굴씨가 신위의 관심을 끈 데는, 비파라는 악기 자체의 매력도 있었겠지만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의 황후를 모셨던 궁녀에 대한 남다른 관심이 작용했을 것이다. 조선 후기의 지식인들은 명나라에 대한 짙은 향수와 신흥 청나라에 대한 깊은 경멸을 함께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굴씨 여인의 삶은 정조 24(1800)에 정조의 명에 따라 의례의 여러 사례를 모아놓은 존주휘편에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얼마전 고양시는 한동안 방치되어 있던 굴씨 여인의 묘를 정리하고 그 앞에 안내판을 설치했다. 행여 이곳을 지나치게 되면 굴씨 여인의 붉은 묘에 들러 낯선 땅에서 생을 마감한 한 여인의 삶에 잠시 애도를 표해보자.

 

 

참고자료

 

<고양이야기여행> 이상국, 고양시 관광개발과, 2012

이한성의 옛절터 가는 길 - 임금이 모질면 나라가 이 모양이니’,

CNB 저널 201222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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