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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종의 명에 의해 권율도원수를 모시다. 행주서원(1842)


학예연구사 심준용


지 정 번 호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1호

                             소 재 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주외동 162-1

 

행주서원(杏州書院)은 행주대첩을 이룬 명장 충장공(忠莊公) 권율(權慄, 1537〜1599) 도원수의 전공을 기리고 호국충절을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된 것으로 행주산성 서쪽 200m지점 한강가에 있습니다.

왕이 고양 서삼릉에 거동할 때마다 임진왜란 당시 공적이 높은 권율장군의 제향을 지낼 건물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겨 헌종 7년(1841)에 왕명에 의해 건립이 추진되고 이듬해인 헌종 8년(1842) 4월 29일에 완공되면서 바로 사액되었습니다. 사액명은 기공사(紀功祠)로 본래 사우(祠宇)로서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정리하자면 본래 이곳은 권율장군을 모시기 위한 사우로 건립되었다가, 이후에 후학들을 가르치는 서원의 기능이 더해진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사우와 서원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당시의 상황을 대변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읍지(邑誌)에 의하면 조선 후기에는 약 20명 정도의 원생들이 있었다고 하네요.

1845년 5월에는 권율장군의 후손과 여러 일가들이 영의정 조인영에게 요청하여 헌종 11년(1845) 8월 기공사 경내에 행주대첩비(중건비)를 건립하게 됩니다. 이 비석에 대한 이야기는‘행주대첩비’편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행주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은 고양시 유일의 서원이 되었는데, 그 이유는 행주서원과 관련된 사대부의 세력이 크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유생’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정책이었음을 연관시킨다면 쉽게 이해되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사우가 무너지고 담장이 붕괴되는 등 퇴락하였다가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에 들어 전국 향교의 일반적 사례와 마찬가지로 관심있는 지방 유지 및 유림들의 노력으로 다시 복구되었습니다. 이렇게 복구된 건물은 한국전쟁을 지나며 다시 소실되었으며, 이후 사당은 터만 남은 채 문간채와 강당만으로 한동안 유지되었습니다. 당시 행주초등학교도 소실되어 서원 강당에서 학생들이 수업을 받기도 했답니다.

1970년대 이후 또한 차례의 변화가 찾아오는데 바로 ‘행주산성정화사업’입니다. 행주산성 내에 권율 도원수의 새로운 사당인 ‘충장사’를 건립하게 되는데요. 행주서원에 있던 행주대첩비도 당시에 충장사 앞으로 옮겨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후 행주서원에서 올리던 제향은 충장사로 옮겨지게 되었고, 기공사는 빈 터로 유지되다가 1988년 이후 꾸준히 재건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됩니다. 1999년 7월에 사당을 신축하면서 다시 기공사에서도 제향을 올리게 되었답니다.

한편 행주서원은 고양시의 역사와 관련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많이 전해집니다.

한때 6.25때 훼손된 행주서원은 마을주민들이 살림집으로도 이용했었다고 하는데요. 일대가 모두 쑥대밭이 된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겁니다. 당시에 문간채를 개조해서 살림집으로 사용하면서 외삼문이었던 문간채는 외이문이 될 수 밖에 없었지요. 이 문간채에서 아이들이 출산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 ‘외이문’은 최근까지도 그 모습을 유지하다가 2011년에 비로소 원래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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