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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산대군 사당의 모습이다

안내판에

월산대군 안내판이 없어져

한참을 가다가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돌아왔던 곳이다

 

이제 안내판이 빠진 방향으로 걸어간다

                                                                    출처 : 지식의 수집광 블로그

집에서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블로그(지식의 수집광)님의 사진을 보고서야

안내판이 망가졌음을 확인하였고... 

도로옆 하천이 물구리천이란다

철도건널목이 나오고

안내판을 읽어보자

능곡과 의정부를 연결한 철도란다

원당, 벽제, 장흥, 송추를 거쳐가는 코스로서

자연환경이 아름다워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 인기를 끌었단다

 

지금은 여객운송을 중단하고

화물 및 특수열차만 운행한단다

 

진터말은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의 이여송군대가

평양성을 탈환하고

벽제관으로 내려와 일본군과 전투를 치를

왜군이 진터말에서 머물렀다 하여

진터말이라는 유래가 생겼단다

 

벽제관 전투는

일본군을 얕잡아본 명의 전투로

일본군의 승리로 귀결되었으며

이후 명은 전투력이 많이 상실되었으며

심유경의 협상과 전투를 병행하였고

임진왜란은 장기화되었다

 

경의선 철로의 모습이다

나무로 받침목을 사용한 것 같다

오래되었음이 느껴진다

 

지금은 받침목도

다 쇠로 되지 않는가

도로를 따라 계속 걷는다

멀러 마을쪽으로

논을 이용하여

썰매장을 만들어 놓았고

그곳에서 썰매를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테마동물원 쥬쥬 2.36km

산대군 사당 0.88km란다

 

제대로 방향을 잡은 것 같다

안내판을 보니

가는 길이 줄어들었지 않는가

물구리 3교란다

가는 방향의

예쁜 집도 찍어보고

조금 멀리 건물도 찍어보고

가는 길이다

눈이 거의 없다

차만 자주 다니지 않는다면

걷기에 좋을 것 같다

조경을 해 놓으니

눈에 덮여 있어 운치가 있다

 

마을 앞에 느티나무가 보인다

안내판과 설명판도 보이고

안내판을 보자

테마동물원 쥬쥬 2.8km

월산대군 사당 0.44km란다

월산대군 사당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물구리마을은 월산대군 후손들이 살고 있으며

자연촌락 마을이란다

원래는 수곡이라 하였으며

물이 많은 곳이었단다

 

이곳에 있는 느티나무는

마을의 풍치를 목적으로 심은 것으로서

보호수로 지정하여 관리한단다

느티나무 위로는 묘지가 있다

문인석이 한쌍 보인다

조선국 중의대부

회의군 이공 철남지묘

밀(?)양현부인 신씨

...

수령이 100년이란다

경운기가 보인다

오랜만에 보니 반갑다

언젠가는 경운기도 사라지는 신세가 되겠지

쟁기로 소를 가는 모습도 거의 사라졌으니...

자꾸 첨단의 기기들이 나오고

그러하다보면 기존의 장비들은 자연스럽게 사라져 버리니

마을을 지나

계속 걸어간다

고개를 넘는다

저곳을 넘으면 무엇이 나타날까

고양누리길이 위에 적혀 있고

밑에는 송강누리길 코스가 표기되어 있다

안내판과 설명판이 있다

월산대군 사당앞인가 보다

테마동물원 쥬쥬 3.23km

송강절철 시비 0.7km란다

 이곳에서 50m 거리에는

조선 9대 임금의 친형인 월산대군 사당이 있단다

사당의 명칭은 석광사이며

경기도에서 지정문화재로 관리한단다

 

월산대군은 이곳에서 별장을 짓고

풍월정이라 하였으며

여생을 보냈다 한다

월산대군 사당으로 향한다

산 중턱에는

문인석 등 석상이 있어

생전에 지체가 높았음을...

아니면

후손들이 잘 살고 있음을 느길 수 있다

비석 및 문인석 등 석상을

크게 확대해 봤다

월산대군 사당이 보인다

담으로 둘러 쌓여 있고

지붕에는 눈이 소복이 쌓여 있다

 

월산대군에 대하여 살펴보자

월산대군은

계유정란으로 조카인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한 세조에게

둘도 없는 동지가 있으니

정희왕후 윤씨란다

 

세조와 정희왕후 사이에는 두 아들이 있었으니

첫째가 의경세자이며

둘째가 해양대군이었다

 

의경세자가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20세에 죽자

해양대군이 세자를 이어받고 왕위에 올라 예종이 되었다

그 후 예종 역시 1년여만에 서거하니...

 

이때 예종에게는 4살짜리 제안대군이 있었고

돌아가신 의경세자에게는 

16살의 월산군

13살의 자을산군이 있었다

 

이 때 왕위에 오른 사람은 자을산군이었으니

당시에는 세조가 어린 예종을 보좌할 목적으로

원로대신들이 임금을 보좌하는 원상제를 만들었으니

이때의 원로대신은 한명회, 신숙주 등이었다

 

자을산군은 한명회의 사위였으니...

팔이 안으로 굽지 않겠는가

지붕에 소복이 쌓여 있는 눈을 보라

아름답지 않은가

지붕선에 맞추어

눈도 쌓여 있는 모습을...

 

월산대군을 생각한다

지상에는 하나밖에 없는 군주요

이를 넘보거나 다른 맘을 품었다가는 어떻게 될지는...

특히나 왕의 형이었으니

처신을 더욱 조심할 밖에...

광해군의 형인 임해군은 죽음을 당하였으며

세종의 형님인 양녕대군은 한동안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살아야 했으니...

측면밑에 벽에는

돌이 박혀 있어

아름다움을 더하고

 

월산대군은

숨을 죽이고 살아가는 방법을 체득해야 했느니...

조금이라도 의심쩍은 일을 벌이면

어느 새 역모로 몰리는 것은 뻔한 일...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자연을 벗삼아 풍월을 읊으며

사는 것이 본분이지 않겠는가

 

대군의 집은 정동(덕수궁옆)이었으며

성종은 안국동에 사저를 하사하고 풍월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또 대군이 찾은 곳은 고양이었으니

별장이라고나 해야 할까

나무는 우람하게 하늘로 치솟아 있고

 

이렇게 살던 대군은

어머니 소혜왕후 시약에 과로하다가

죽으니 춘추가 36세란다

 

이때 장사지낸 곳이 별서(고양)의 서쪽이었단다

하늘의 풍경과 어우러진

나무들을 본다

 

대군의 사당은 지금 이자리에 세웠는데

지금의 크기는 영조때 이루어졌다

 

영조의 어머니는 무수리 출신의 숙빈 최씨였는데

(연속극 동이의 주인공임)

살아서는 천대를 받았으며

하늘같은 임금이 되어 무엇이든지 해줄 수 있는

위치에 올라서는

이미 돌아가신 뒤였으므로

어머니에 대한 안타까움이 각별했던 영조...

하여 보광사를 원찰로 삼고

어머니의 묘소를 자주 찾아뵙고

뒷박고개라는 말까지 탄생시켰으니...

영조는 생모인 숙빈 최씨의 묘역(소령원 : 파주 광탄)을 찾아가는 중에

쇄락한 묘역을 보고

누구의 묘인가를 물었단다

월산대군의 묘임을 확인하고는

후손을 찾았단다

회화나무로

250년이 되었단다

 

후손들이 홍주에 살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돈을 주어 사당을 중건하게 하고

이곳으로 이사오게 하여

사당을 보살피게 하였으며

석광사라는 편액을 하사했단다

월산대군 사당의 설명문을 보자

월산대군은 문장이 아주 뛰어나

중국에 까지 알려졌다고 한다

성종은 친형이 머문 이곳을 자주 방문하였으며

풍월정이라 이름 붙여졌다 한다

사당의 모습을 그림으로 표기했다

 

월산대군에게는 또 내려오는 말이 있으니

월산대군의 부인이란다

 

연산군일기에는

월산대군 이정의 처 승평부부인 박씨가 죽었다

사람들은 왕에게 총애를 받아 잉태하자

약을 먹고 죽었다고 한다

 

이때 연산군의 나이 31세

승평부부인은 52세였다

 

승평부부인은 월산대군과의 사이에서 아기가 없었다

그랬던 52세의 여인이 잉태를 했다

어머니처럼 따르던 큰 어머니를...

사관은 자신이 말을 하지 않고

소문을 빌려

~하더라라고 표현하였다

측면에서 사당을 찍어봤다

문은 세개의 문으로 이루어졌고

기와지붕이 씌워졌으며

이름하여 삼문이라 한다

사당의 모습이다

창살은 색이 칠해졌으며

앞면과 옆면의 크기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아

안정감이 있어 보인다

창문을 찍어 보았다

사당의 벽면은

돌을 사용하여 지어서 그런지

아름답다

흙으로 된 담위에는

기와를 얹었고

눈이 그 위에 쌓여

풍경이 되었다

지붕을 보라

눈에 소복이 쌓여 있는 모습...

회화나무와

담장과

사당이

한폭의 그림처럼 다가온다

다시 걷는다

누리길은

제주도 올레길의 성공에 이어

지리산 둘레길 등이 생겨났고

전국에서 새로운 이름으로 만들어졌다

 

고양시는

배다리누리길

서삼능누리길

송강누리길

고양누리길

고양동누리길 등이 있다

큰 도로에 나왔다

원당역 4.6km

송강정철시비 0.45km

월산대군 사당 1.25km란다

능골마을 소개가 있다

월산대군의 묘소가 왕릉같다 하여

능골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한다

 

월산대군의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단다 

현 위치가 표기되어 있다

왼쪽면을 크게 찍었다

오른쪽면을 크게 찍었다

테마동물원 쥬쥬, 송강문학관, 공릉천이 소개되어 있다

또한 월산대군 사당이 설명되어 있다

도로를 따라가니

너멍골주유소,

원신동 주민센터가 나타난다

드디어 송강문학관이 옆에 있다

송강마을에 대한 설명이다

송강마을 주변으로는

공릉천이 있고

매봉이 있으며

공릉천에서는 북한산이 보인다

이곳에서는 송강이 머무르며

가사문학을 일궜으며

아직도 송강보, 송강고개 등이 있단다

매년 송강문화제를 개최한단다

송강문학관으로 가는 곳에 마당갈비가 있다

송강문학관앞 마당에는

우물이 있다

송강마을에 있는 송강정철 가족의 묘가 표기되어 있다

특이한 것은 의기 강아묘가 있다

강아라 ~

송강이 전라관찰사로 재임할 때

그를 사랑한 남원의 어린 기생 자미가 있었다 한다

송강이 자미를 사랑하자

사람들은 송강의 강자를 따서 강아라 불렀다는데

송강의 사랑스러운 첩이라고 할까

 

송강이 임금님을 모시는 도승지로 떠나면서

지어주었다는 시를 보자

 

자미화를 노래함

 

봄빛 가득한 동산에 자미화 곱게 펴

예쁜 얼굴 옥비녀보다 곱구나

망루에 올라 장안을 바라보지 마라

거리에 가득한 사람들

모두 다 네 모습 사랑하리니

 

시를 보니 다른 남자들이 노릴까봐

질투하였나 보다

 

그뒤 강아는 어떠하였을까

정철을 찾아 강계로 찾아갔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장 소서행장을 유혹

주요 정보를 빼내어

평양성을 탈환했다는데

미인계를 썼다...

믿거나 말거나

 

 

그후 머리깎고 스님이 되었다가

정철이 죽자

정철의 묘소곁에서 일생을 보냈다 한다

박종화 선생이 연재한

조선일보의 '자고가는 저 구름아'에 나온단다 

마당 한쪽에는

이곳에 부모님 묘소가 있어

십여년을 머물렀다 한다

 

송강 정철은 효심이 깊었나보다

삼십대 중반에 부친상, 모친상을 당해

이곳 신원동에서 6년간이나 시묘살이를 했단다

 

또 50대 때 4년간 이곳에 머물렀고

삶을 마친 후 이곳에 안장되었다가

사후 72년 후에 서인의 대부 우암 송시열에 의해

충북 진천으로 이장되었단다

 

고양시에서는

2003년부터 매년 송강문화제를

개최한단다

송강문학관 건물이다

맨 뒷쪽에 송강문학관이라고 적혀 있다

하지만 문이 닫혀 있고...

이은만이라는 분의 문패가 걸려 있다

 

평소에는 살림을 하면서

한쪽에 여러 기념물들을 놓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송강 정철시비가

돌로 조각되어 있다

 

송강은 누구인가

송강 정철은 율곡이이와 동시대를 살았으나

율곡 이이가 평생을 각 당파의 화해를 위해 진력을 다한 반면

송강 정철은 철저하게 서인의 맹렬한 선봉장으로서 활동했다

 

조선 선조때 서인의 영수로서

두각을 나타낸 사건이 있었으니

기축옥사다

 

기축옥사는

정여립과 관련된 역모사건이다

정여립은 한때 서인이었고

율곡과 우계의 문하에 드나들며

주자가 완전히 익은 감이라면

율곡은 반쯤 익은 감이라고

율곡을 칭송하였다

 

하지만 율곡 사후

동인으로 돌아서서 율곡을 헐뜯어 선조의 노여움을 사게 되고...

 

정여립은 이후

진안으로 내려가

대동계를 조직해서 군사훈련을 시켰고

평소에도 천하는 공물이니

어찌 주인이 있겠는가라는

왕조체제를 부정하는 말을 서슴없이 하고 다녔기 때문에

황해감사 한준견의 비밀장계는 확증이 되었고 체포령이 떨어졌다

 

관군에 쫒긴 정여립은

자결로 생을 마감하고...

드디어 옥사가 일어났다

나무 장승이다

장승과 송강 정철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

 

선조는 정철을 불러들여 역모자들을 추국하는 일을 맡겼으니

정여립과 가깝게 지냈던

이발, 백유양, 최영경, 정개청 등이 이 혼란의 와중에서

죽어나갔고

천여명의 선비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기축옥사의 후유증은 컸으니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나누어지고

쓰임이 다한 정철은 선조로 부터 버림을 받는 처지가 되었으니

 

정비로 부터 대군을 얻지 못한 선조는

세자를 책정하여야 하는 입장으로

 

이산해, 유성룡, 정철 등이 선조에게 찾아간 가운데

정철만이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해야 한다고 고했으니

 

선조의 미움을 받아

송강 정철은 벼슬을 삭탈당하고 머나먼 유배길에 오르게 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잠시 석방되지만

전란이 안정되자

선조의 미움을 받아 파직되고

강화도에서 굶주림에 시달리며

쓸쓸하게 생을 마감하게 된다

 

결국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정권을 잡은 후에야

명예가 회복된다

 

하지만 문학사적으로는 탁월했으니...

 

 

 

정 송강 유택을 찾아서

 

낙엽 진 텅빈 산 빗소리 스산한데

풍류재상 말없이 여기 누으셨구나

슬퍼라 한 잔 술 권해 올릴 수 없음이여

지난 날 장진주사인 날을 이름하셨구려

 

송강의 장진주사의 시조를 보자

 

한 잔 먹세 그려

또 한 잔 먹세 그려

꽃 꺽어 셈하고

무진무진 먹세 그려

이 몸 죽은 후면 지게 위에 거적 덮어

졸라 매어지고 가나

화려한 상여에 만 사람이 울며 가나

억세, 속세, 떡갈나무, 백양속에 가기만 하면

누른 해, 가는 비, 굵은 눈, 쌀쌀한 바람 불 때

누가 한 잔 먹자 할꼬

하물며 무덤 위에 원숭이 휘파람 불 제에

뉘우친들 무엇하라  

훈민가와 송강문화 선양회의

내용이 있다

훈민가

 

아버님 날 낳으시고

어머님 날 기르시니

두분 곧 아니시면 

이몸 어찌 살았을까

하늘같은 가없는 은혜

어이 다 갚사오리...

송강문화 선양회 설립 목적이라

송강 정철에 대한 내용이라

살펴보자

송강은 관동별곡 등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가사와

훈민가 등 시조를 남겼단다

 

시풍은 호탕하고 비장하며

가사와 단가에서는 한문투를 벗어나

자유자재로 우리말을 구사하여

한글을 가장 아름답고 쉽게 펼친

시가문학의 대가다

 

송강은 시묘살이를 이곳에서 하면서

왕성한 작품구상도 했단다

 

충효사상과 공선후사의 공복정신을 기리고

우리 시가문학의 창의성과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자

훈민가 시비를 세워 만세의 귀감으로 한단다 

1997년 시비를 건립하고

송강정철 시비건립 추진위원장 이은만 님의 글

조금 크게 확대하여 봤다

 

송강 정철의 시비를 뒤로 하고

공릉천으로 향한다

 

다음에는 공릉천에서 필리핀 참전비까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공릉천에는 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필리핀 참전비에는...

 

식사동 주민센터 길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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