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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은 픽션이 아니었다? 행주산성(1593)

 

지 정 번 호 : 사적 제56호

소 재 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주내동 산26

 

1. 행주대첩을 생각하며

전쟁은 영웅을 만든다고 했습니다. 잘나가던 영의정 집안의 자재로 태어나 당파싸움 그칠 줄 모르는 바깥세상을 등지고 지내던 권율. 46세가 되던 해에 처음으로 벼슬길에 나간 그였습니다. 그로부터 10년 뒤 일본군이 조선을 쳐들어오자 환갑을 앞둔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붓 대신 칼을 들고 지휘하여 조선을 구한 영웅이 바로 ‘권율 장군’입니다. 임진왜란이 없었던들 그의 영웅 됨을 누가 알아볼 수 있었을까요? 승자의 기록인 ‘역사’에서 임진왜란에서의 그의 기록은 화려하기 그지없습니다.

행주산성은 우리의 위대한 영웅 ‘권율’과 그의 현명한 수뇌부, 그리고 자랑스런 관군, 의병, 승병들이 임진왜란의 3대첩 중 하나인 ‘행주대첩’을 만들어 낸 곳입니다. ‘행주치마’로 대한민국 사람이면 누구나 들어본 ‘행주산성’. 하지만 행주대첩의 자세한 이야기를 살펴보면 ‘행주치마’의 이야기는 수많은 무용담 중 하나일 뿐이라는 생각을 누구나 가지게 될 것입니다.

 

2. 행주대첩 당시의 조선

일본군은 임진왜란 개전(1592년 4월 14일) 20일 만에 조선의 수도인 한성에 무혈 입성하였고 2개월 만에 조선 최대의 전략 요충지인 평양마저도 함락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조선 정부는 전쟁 지도력을 상실하였고, 관군은 여러 전투의 패전으로 와해된 상태였으며, 전국의 중심 지역은 거의 일본군 점령지가 되었기에 전쟁은 이미 끝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수군과 의병들에 의한 후방지역을 공격받은 일본군은 확대된 전선으로 더 이상의 공격로를 연장할 수 없었습니다. 여기에 명나라군사의 참전 조짐이 있자, 일본군은 대동강을 경계로 한 휴전협상을 제의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휴전협상의 결렬로 명군은 압록강을 도하하여 조선에 진군하였습니다. 조명연합군은 대대적인 반격 작전을 감행하여 1593년 1월 8일에 평양성 탈환에 성공하고, 이 여세로 일본군을 압박하자 일본군들은 후퇴하여 한성에 집결하게 되었습니다. 전라도관찰사 겸 순찰사인 권율(1537~1599)은 1592년 12월 이래로 수원의 독성산성에서 주둔하면서 일본군의 간헐 적인 공격을 저지하고 있었습니다.

 

3. 명장 권율

권율(1537~1599)은 문신출신의 명장입니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는 언신(彦愼), 호는 만취당(晩翠堂)․모악(暮嶽)이었습니다. 도첨의(都僉議) 권보(權溥)의 9세손으로 할아버지는 강화부사 권적(權勣)이고, 아버지는 영의정 권철(權轍)이며, 어머니는 적순부위(迪順副尉) 조승현(曺承晛)의 딸이다. 이항복(李恒福)의 장인이기도 합니다. 소위 뼈대있는 가문이시죠.

지금으로 치자면 퇴직할 나이인 45세까지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만 몰두하다 1582년(선조 15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전적을 거쳤습니다. 1587년 전라도도사가 되고 이듬해 예조정랑․호조정랑․경성판관(鏡城判官)을 지냈습니다. 1591년에 다시 호조정랑이 되었다가 바로 의주목사로 발탁되었으나, 이듬해 해직되었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서울이 함락되자 광주목사(光州牧使)로서 방어사 곽영의 휘하에서 중위장이 되어 용인(龍仁)에서 싸웠으나 패전했습니다.‘영웅’의 탄생은 곽영의 휘하에서 벗어나 전라도관찰사가 되고 난 후였습니다. 남원(南原)에서 1천여 명의 의용군을 모집하여 다시 북진, 금산에서 전주로 들어오려는 고바야카와(小早川隆景) 정예부대를 맞아 동복현감(同福縣監) 황진(黃進)과 함께 이치(梨峙)에서 싸워 승리하였습니다. 계속하여 정병 8,000명을 인솔, 병마절도사 선거이(宣居怡)를 부사령관으로 삼아 서울로 진격하던 도중 수원(水原) 독산성(禿山城)에 주둔하여 견고한 진지를 구축하고 우키타 히데이에[字喜多秀家] 부대의 공격을 격퇴했습니다. 1593년 병력을 나누어 선거이에게 시흥(始興) 금주산(衿州山)에 진을 치게 한 후 2,8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幸州山城)에 주둔하였습니다. 왜군은 3만의 대군으로 7대로 나누어 계속하여 맹렬한 공격을 가하여 성이 함락될 위기에까지 직면하였으나, 일사불란한 통솔력과 관군과 의승병이 사력을 다하여 승리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이 싸움에서 일본군은 2만 4,000여명의 사상자를 내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며, 권율은 그 전공으로 1596년 충청도순찰사에 이어 도원수(都元帥)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행주대첩’인 것이죠.

그후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적군의 북상을 막기 위해 명나라 제독 마귀(麻貴)와 함께 울산(蔚山)에서 대진했으나 전쟁의 확대를 꺼리던 명나라 장수들의 비협조로 공격하지 못했습니다. 1599년 노환으로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7월에 사망하였습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에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으로 추봉되었습니다. 1841년 행주에 기공사(紀功祠-현재의 행주서원)를 건립하여 그해 사액되었으며, 그곳에 향사되었습니다. 그가 임진왜란 때 활약한 공훈을 중심으로 기록된 사적이 ≪권원수실적(權元帥實蹟)≫이라는 책명으로 1권이 전합니다. 시호는 충장(忠莊)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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