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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은 픽션이 아니었다? 행주산성(1593) - 3편 행주산성전의 전개


  고양시문화유산답사기 / 고양시의 문화유산

2012/04/10 08:11  수정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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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은 픽션이 아니었다? 행주산성(1593)


고양시청 학예연구사 심준용

 

5. 행주산성전의 전개

권율은 행주산성이 단지 한성 공격을 준비하는 주둔지에 불과하기에 성책을 준비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조경(趙儆)은 “외로운 군사로서 큰 적과 가까이 있으니 성책이 없을 수 없다.”고 하면서 성책 설치를 주장하였죠. 그런데 2월 8일 마침 직산현 방면에서 양주에 올라와 있던 도체찰사 정철(鄭澈)이 전황에 대한 논의차 권율을 소환하게 되자, 이 기회를 이용해서 조경은 모든 군사를 동원해서 이틀 만에 이중의 목책성을 만들었습니다. 성책 공사가 완료된 후에 진영에 돌아온 권율은 이를 보고 기쁘게 여겼다고 합니다. 3일 후에 적의 대군이 공격해 온 것입니다.

권율은 활과 화살을 점검하고 화차와 총통과 화약을 정비하였습니다. 수차 석포와 투석전에 사용될 돌들을 산적하고, 진지 후방에는 여러 개의 가마솥을 준비하여 방화용수를 채우도록 하였습니다. 또한 적의 화공작전에 대비해서 젖은 수건 한 개와 재가 들어 있는 주머니를 한 자루씩 허리에 차도록 하였습니다. 일본군은 행주산성의 권율군이 비록 소수이지만 전일에 당한 이치전와 독성산성전의 치욕을 갚고자 한성에 주둔하고 있는 전군을 동원해서 섬멸하기로 결의하였습니다. 조선 출정에서 한번도 진두에 나서본 일이 없었던 총대장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를 위시해서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마스다 나가모리(增田長盛)․오다니 요시쯔구(大谷吉繼)의 3봉행(奉行) 등 본진 장군들까지 7대로 나누어 전 병력 3만명으로 홍제원(현재의 홍제동 인근) 나와 행주산성으로 진군하였습니다. 도성 안의 일본군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정탐군의 보고가 있자 권율은 모든 군사들을 모아 놓고 일장 훈시를 하였습니다.

“이제 자세히 적세를 살펴본다면 그 양과 질에서 우리가 맨손으로 당해 낼 도리가 없으니 무엇으로써 제압해 이길 것인가. 오직 한 가지 죽음으로써 나라의 두터운 은혜에 보답하는 길밖에는 없도다. 남아는 의와 기만을 생각할 뿐이지, 어찌 공훈과 명예를 누가 다시 논하랴. 천사람이 한마음으로 서로 죽기를 맹세하자.”

라는 장군의 훈시를 통하여 이번 전투가 병사들의 생사는 물론하고 바로 국운이 달려 있음을 주지시켜 장병들의 결사보국의 결의를 다짐시켰습니다. 2월 12일 아침 전방 척후로부터 적의 공격 이동의 보고가 있었습니다. 권율은 병사들에게 먼저 아침을 먹게 하고는 임전태세에 들어갔습니다. 적의 선봉 100여 기병이 나타나고 뒤이어 대군이 밀려왔습니다.

적의 선공 제1대장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로 그의 군사는 평양전에서 대패한 이후 벽제관전에도 참석하지 않고 있다가 설욕의 기회로 삼아 조총부대를 앞세워 돌진하였습니다. 아군은 성책의 바로 앞까지 오게 한 후 주장의 큰북 3타로 공격을 명하자 미리 준비된 화차, 수차석포, 총통, 강궁으로 일제히 발사하였습니다. 조선군의 갑작스러운 집중공격을 받은 일본군은 궤멸 상태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다음에는 제2대장 이시다를 비롯한 3봉행과 더불어 마에노 나가야스(前野長康)가 진두에서 휘하병을 지휘하고 돌진하였습니다. 강궁으로 연사하여 적장 마에노가 흉부에 관통상을 입어 달아나자 제2대 공격 병력들은 그대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이어 일선으로 진출한 제3대장 구로다는 전해9월에 연안성(延安城)전투에서 조선군의 위력을 실감했기에 공성무기인 누대(樓臺)로 공격해 왔습니다. 이 누대 위에 조총수 수십 명을 올려놓고 조총을 쏘게 하면서 나머지 군사들은 아군 진지에 접근시키지 않는 신중한 작전을 전개하였습니다. 이에 조경은 지자총통을 쏘아 누대를 깨뜨리고 또 포전 끝에 큰 칼날 두 개씩을 달아 발포하여 방어하였습니다. 일본군이 공격을 주저하면서 게걸음 작전으로 옆으로 피하자 다시 진천뢰(震天雷)로 공격하니 적은 일시에 후퇴하고 말았습니다.

일본군의 연속된 공격에도 불구하고 성을 점령하기는커녕 제1성책도 돌파하지 못하자 보다 못한 총대장 우키다는 노하여 최선두에 나오니 이에 소속한 제4대 장병들도 죽음을 무릅쓰고 모두 그를 뒤따랐습니다. 적들은 많은 희생자를 내면서도 돌진해서 제1성책을 넘어섰으며 그의 부장 토가와 다찌야스(戶川達安)는 제2성책까지 접근하였습니다. 이 때에 권율은 북을 울리면서 전세를 살피다가 도망치는 아군 한명의 목을 베어 효시하자 도망갈 생각을 포기하고 역전하였습니다. 화차의 총통을 총대장에게 집중 사격하자 우키다는 마침내 부상을 당하고 퇴진하였습니다. 또한 이때까지 남아 지휘하던 제2대장 이시다도 부상을 입어 후퇴하였습니다.

제5대장 키카와 히로이에(吉川廣家)가 지휘하는 일본군은 화전을 집중발사하여 제2성책의 일부가 타기 시작하자 조선군은 미리 준비한 방화수로 꺼버리고 시석(矢石)을 퍼부으니 그는 부상을 입고 퇴주하고 말았습니다.

이어 제6대장 모리 모토야스(毛利元康)는 힘을 다하여 제2성책을 점령하려고 맹공을 가하여 왔습니다. 이때 승장 처영은 서북쪽의 자성(子城)에서 1천여 명의 승병을 거느리고 적의 공격을 끝까지 막아냈습니다. 적들이 근접한 지경에 이르자 재주머니의 재를 뿌려서 적이 눈을 뜨지 못하게 하는 전법까지 전개하였습니다.

적은 마지막에는 공격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제7대장은 노장인 고바야카와 다카가게(小早隆景)로 선두에 서서 승병이 지키고 있는 서북쪽의 자성을 공격해서 그곳의 일각을 뚫고 내성에 돌입하려하자 승병들이 동요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에 권율은 대검을 빼어들고 승군의 총공격을 호령하며 적과 치열한 백병전을 전개하였습니다. 옆 진영에 있던 아군도 적을 향해 무수한 궁시를 집중 발사하니 전투는 최고조에 이르렀습니다. 이때 조선군은 화살이 다하여 투석전을 폈는데 적이 이것을 알아차리고 기세를 올리려 하였습니다. 이때 부녀자들은 치마를 짧게 잘라 허리에 묶고 거기에 돌을 담아 날랐다고 합니다. 때마침 경기수사 이적(李蹟)이 수만개의 화살을 가득 실은 배 2척을 몰고 와서 보급하여 주었으며, 또한 전라도 조운선 40여척도 들어와서 양천 포구를 뒤덮게 되니, 아군의 사기가 충천하여 적군을 완전히 격퇴시키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일본군은 아침 해뜰 때부터 저녁 해질 때까지 7번 공격에서 7번 패전해서 물러간 것입니다. 날이 저물면서 일본군은 조선군의 기습에 대한 대비책으로 시체를 네 곳에 모아 불태우고는 한성으로 퇴각하였습니다. 일본군은 총대장 우키다를 비롯해서 키카와 ․ 이시다 ․ 마에노 등 4명의 장령이 부상을 당하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조선군은 일본군이 버리고 간 기치(旗幟), 갑주와 창검류 등 습득한 군기물이 727건이나 되었고, 유기한 적의 시체만도 130급에 달하였습니다.

마침 명나라 부총병 사대수(査大受)가 임진강 일대를 순시 중에 행주산성의 대승 소식을 듣고 다음날 그의 비장을 행주산성에 보내어 전투지역을 확인토록 하였습니다. 권율의 승전을 확인한 사대수는 예물을 보내어 승전을 축하하였습니다. 사대수는 권율 진영을 방문해서 자기의 부장들에게 말하기를 “권감사의 군사는 다른 군보다 특별히 뛰어난 군사이다. 참으로 외국에 진정한 장수가 있도다.”하고 감탄하였다고 합니다. 그 뒤 3월에 경략 송응창(宋應昌)은 명나라 조정에 행주대첩을 보고하기를 “전라도관찰사 권율이 외로운 군을 이끌고 요충지를 지키면서 백성을 불러 모아 뛰어난 계책으로 강적을 물리쳤으니, 이는 국가의 위급을 구한 충신이요 중흥의 명장입니다. 이제 홍비단 4필과 은 50냥을 그에게 상으로 내리시어 충성과 용맹을 권장하게 하소서.”하였습니다. 3월에 병부상서 석성(石星)은 명나라 신종(神宗) 황제의 성지(聖旨)를 받아왔습니다. 이 칙서에 이르기를 “조선국은 본래부터 강한 나라로 알려져 왔는데, 전라도 관찰사가 많은 왜적의 목을 베고 사로잡았다고 하니, 그것이 사실임을 알겠노라. 이는 조선국 인민의 사기를 진작시킬 수 있는 것이라. 관원을 보내어 선유하는 바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후로 명나라의 관원들은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권율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그 분은 지난날 행주산성에서 대승을 거둔 분이 아닌가?”라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천자국의 위세를 내세워서는 조선국 문무대신들을 멸시했던 그들까지도 권율 장군의 업적만은 인정했던 것입니다. 조정에서는 권율에게 자헌대부를, 조경에게는 가선대부를, 승장 처영에게는 절충장군을 수여하였습니다. 선조도 권율을 칭찬하기를 “경이 아니었으면 국가를 어찌 얻을 수 있었으리요.”하였습니다. 이 행주대첩으로 말미암아 명나라 경략 송응창은 명예를 얻었고 권율은 조선을 중흥시킨 명장이 되었습니다

한편, 행주산성에서 크게 패한 일본군은 조선군의 반격과 의병의 유격전, 명군의 남진 등으로 사기가 크게 위축되었고 여기에 군량미는 거의 바닥나고 도망자까지 속출되는 어려운 지경에 이르자 더 이상 한성 점령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3월 13일 용산에 쌓아 두었던 군량미 수만석이 조선군 정찰조에 의해 불타자 군량미 사정은 더욱 악화되어 한양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죠. 일본군은 조선군의 추격을 염려하여 조선측을 배제시키고 명측과 단독 강화협상을 벌였습니다. 명측은 4월 18일 이를 수락해서 다음 날인 l9일 일본군은 한성을 퇴각하였습니다. 조선군은 끝까지 강화 협상을 반대하였습니다. 당일에 권율이 파주로부터 군사를 인솔해서 입성한 다음 도강하여 적을 추격하려 하였으나 이여송이 유격장 척금을 보내 노량진의 나룻배를 거두어 한강 도하작전을 방해하였습니다. 퇴각한 일본군은 본국으로 철수하지도 못한 채 경상도 연해지역인 울산 서생포에서 거제도에 이르는 요충지에 성을 쌓고 한편으로는 강화협상을 벌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장기전에 대비하는 이중적인 작전을 취하게 되었습니다.


※ 강성문, 2006,『임진왜란 초기육전(初期陸戰)과 방어전술(防禦戰術) 연구』(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를 참고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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