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조선조 가사문학의 대가이자 서인의 영수였던 송강 정철, 그 수식어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 그를 평가하는 잣대는 2가지이지만 많은 이들에겐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등 가사문학과 더불어 1백여수 이상의 시조등 주옥과 같은 고전문학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송강 정철은 ( 1536 ~ 1593) 지금의 종로의 청운동에서 태어나 중종, 선조시대를 거친 조선중기의 문신이자 문인이었는데 당시 한문이 주류를 이었던 문학사에서 국문학의 새로운 문학사를 열었던 인물로 윤선도와 함께 가사문학의 선구자라 할 수 있겠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신원동에는 그런 그의 흔적을 만날 수 있는 송강문학관이 있어 찾아가기로 했다. 하지만 안내가 미미했던 탓에 몇번의 시행착오를 거친 후 39번 국도 도로변 작은쉼터에 조성된 송강시비를 만날 수가 있었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신원동 송강마을 입구에 조성된 송강 시비공원이다.

그곳엔 한학자인 청명 임창순 선생님이 썼다라는 송강정철 시비와 함께 훈민가를 비롯하여 그의 문학작품을 기리는 여러 글귀가 조성되어 있다.

그곳엔 정철의 문인으로 알려진 권필이 정철의 묘소를 지나며 읊은 시라는 정 송강 유택을 찾아서라는 글이 읽어 한번 읽어본다.

낙엽 진 텅 빈 산 빗소리 스산한데
풍류 대상 말없이 여기 누으셨구나
슬퍼라 한 잔 술 권해 올릴 수 없음이여
지난 날 장진주사 인 날을 이름이셨구려

그리고 송강 정철의 효를 만날 수 있었던 또 한편의 시문학 훈민가다.

 

마을 앞으로는 북한산이 자리해 있고 북한산과 마을 사이에는 공릉천이 흐르며 뒤로는 매봉산이 둘러싸인 좋은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는 이곳이 송강마을이라 불리우게 된데는 그의 나이 35세때 아버지와 어머니가 연달아 돌아가시며 6년여의 시간동안 묘소를 살피어 이곳에서 거주, 여러 시조가사를 남겼기 때문으로 현재에도 송강선생의 선조 및 형제등 가족들의 묘소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송강 정철의 묘 또한 1593년부터 1665년까지 60여년간 이곳에 묻혀있다가는 우암 송시열이 잡아준 진천땅으로 이전되었다라고 한다.
그밖에도 송강마을에는 송강시비 및 유래비석, 송강보, 송강고개등이 남아 있으며 2003년부터 매년 송강문학 축제 또한 열린다 하니 다음을 기약하기도 했다.

송강시비를 지나 골목길로 접어든 후 도보로 5분여를 걸으면 바로 아담한 한옥 고택의 송강문학관이 나타난다. 이곳은 고양문화원장을 지내신 이은만 선생님이 자비를 털어 고택을 구입 송강문학관으로 관리 운영하고 있다하는데 보통은 문이 굳게 닫혀 있는 듯 외관만을 둘러볼 수가 있었으니 많이 아쉬웠다.

하지만 굳게 닫힌 유리문 사이로 들여다본 문학관 내부에는 글씨와 고서 몇권뿐 유품또한 그리 많지 않은 모습으로 제대로 둘러본 다 한들 많이 아쉬워질 것 같은 모습이다.

그러한 문학관 한켠에는 효체험장이 있어 평소엔 인근 학교 아이들의 효체험장으로 운영된다라고 하는데,

어버이 살아실때 섬길을은 다하여라
돌아가신후에 애통한들 무엇하리
평생에 다시 못한 일은 이뿐인가 하노라
- 송강 정철

선생님 돌아가신 아버지와 어머니를 기억하기위해 이곳에 머물렀던 만큼 효에 대한 각별한 생각으로 완성되었을 시를 떠올리면서 부모님 살아생전의 효에 대한 남다른 의미를 되새겨 보게한다.

조금은 아쉽고 안타까웟던 송강문학관을 돌아나와 이번엔 언덕길을 올라 가족묘를 찾아가 본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것은 가족묘 입구에 자리한 의기 강아묘다.

비석도 새로 세워진 듯 하고 관리도 잘되어 있는 묘의 주인은 정철이 전라도 관찰사로 재임시 사랑했던 남원의 동기로 송강의 강자를 따서 강아라 불리웠단다.

야사에는 그녀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하는데 1582년 도승지가 되어 한양으로 떠난 정철을 잊지못한 그녀는 평양도 강계로 귀양가 위리안치되어있는 그를 찾아가지만 임진왜란이 발발하며 충청도의 도체잘사로 임명되었고 그 후 다시 송강을 만나기위해 남하하다가는 적병에 붙잡히자 조국을 위해 몸을 바치기로 결심하고 왜장 소서행장을 유혹, 주요 정보를 빼내어 평양성을 탈환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고 한다. 그 후 소심보살로 입산수도하다하다가는 송강마을에 묻힌 선생의 묘소 곁에서 일생을 지냈다 한다.

의기 강아의 비 뒷면에는 정철 선생이 한양으로 떠나며 지어 주었다는 시가 새겨져있다.

<자미화를 노래함>
봄빛 가득한 동산에 자미화 곱게 펴

예쁜 얼굴 옥비녀보다 곱구나
망루에 올라 장안을 바라보지 마라.

거리에 가득한 사람들 모두 다 네 모습 사랑하리니.

이어 그 너머머로 정철선생의 가족묘가 보인다.

정철선생의 부모와 장자묘다. 그 뒷편으로는 장손과 세째형, 정귀인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는데 그 쯤에서 돌아가기로 하곤 산을 내려왔다.

가족묘에서 바라본 송강마을의 풍경이다. 그중 3칸의 기와집이 바로 송강문학관의 모습이다.

송강 정철의 가족들이 이곳 고양시 송강마을 인근에 자리잡은것은 고려 공민왕 시절부터라고 하며 다섯코스로 조성된 고양시 누리길 중 하나가 이곳을 통과하는 송강누리길로 명명되며 고양시에 조선 가사문학의 대가였던 정철의 유적지가 있음을 뒤늦게 알려져가고 있었다.

길 위에서 조선시대 최고의 시성이며 우리 한글을 가장 아름답고 쉽게 널리 펼쳐주신 가사문학의 선구자 송강 정철을 그렇게 만났다.

 <송강문학관 찾아가는 길>


주 소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신원동



글. 사진 이민숙 (경기소셜락커 두공주와)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