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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시에서 서삼릉 비공개구역을 탐방한단다.

서삼릉에 대하여 이 기회를 활용하여 찾아가 보기로 한다.

 

서삼릉 비공개지역 입구에는

열쇄가 달려있는 철망이 처져 있고

 

담옆에는 효릉에 대한 안내판이 있다.

하여 효릉에 대하여 살펴본다.

 

효심이 극진하였던 인종의 무덤을 효릉이라 하는데

하지만 너무나도 단명한 삶을 살았으니...

대비가 준 떡을 먹고 죽었으니...

그리고 그 다음엔

대비의 아들이 왕위에 올랐으니...

 

떡먹다 속이 더부룩하여 죽었는지

떡에 독이 있었는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또한 비공개지역엔 폐비 윤씨의 묘가 있단다

폐비 윤씨가 누구인가

연산군의 어머니이며

성종의 아내이지 않는가

비천한 신분의 출신인 폐비 윤씨는

승승장구하여 왕비의 자리에 오른다

 

하지만 대비와의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결국 사약을 먹고 한 많은 생을 마무리한다.

 

이밖에도 태를 묻은 태실

공주와 왕자의 묘

후궁들의 묘 등이 있단다

 

한번 들어가 볼까

왕자와 공주의 태실이다

왕자와 공주를 낳으면

태를 도성과의 거리에 상관없이

풍수에 좋다는 곳에 묻었고

관리했단다

 

하지만 조선왕조가 망한 후

일본제국은

이 모든 태실을 한 곳에 모아 보관했으니

이곳 서삼릉 태실이란다.

 

힘이 없는 나라의 운명이란 이런 것일까

생각이 든다.

태실을 묻은 곳에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가지런하게 세워져 있는 태실들...

진전하 태실인가

 

태실은 두 구역으로 나누어져

왕이 된 태실은 검정비석

왕이 되지 못한 태실은 흰비석으로 나누어져

묻혀있다.

 

왼쪽에 있는 것이 왕이 된 태실이고

오른쪽에 있는 것이 왕이 되지 못한 태실이다

 

이동한다

다음은 왕자와 공주의 묘로 향한다.

똑 같은 크기의 무덤과

대군지묘, 왕자지묘 등

비석하나와

대표로 상석 1개

석상 1쌍 등이 있다.

 

일국의 왕자, 공주묘지 치곤

초라하단 생각이 든다.

 

일본 제국주의는

유물을 가져갈 수 있고

조선왕조의 격을 낮출 수 있는 방식으로

이렇게 왕자와 공주의 무덤을

한 곳에 모았단다.

 

만약 당시의 왕이

왕자나 공주의 무덤을 보았다면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

 

문득 생각이 그곳까지 미친다.

고양시 정동일 문화재 전문위원이

이 왕자 공주 묘지에 대하여 설명을 한다

다시 이동을 한다

이곳은 후궁들의 묘지다.

묘지가 다소 커지고

비석이 있으며

앞에 상석이 각각 1개씩 있다

 

한자 실력이 부족해서 인지

숙의 나주 원씨 지묘인지

원씨가 아닌지 모르겠다.

 

그것이 무어 대수이겠는가

정동일 고양시 문화재 전문위원의

해설이 이어진다.

 

탐방에 참여한 사람들의

귀가 그곳으로 향한다.

겨울이라 그런지

양지쪽과 음지쪽의 묘지가

묘한 대비를 이룬다.

다시 이동한다.

폐비윤씨 묘다.

성종의 처로서

후궁에서 왕비까지 한

똑똑한 여인 같다

 

타고난 미모까지 갖췄단다.

 

하지만 미천한 집안이고

명문귀족의 딸인

대비와의 사이가 좋지 않은 점

 

성종의 바람기에 화가 난 나머지

성종의 얼굴을 손으로 할 퀸 일로

폐비가 되고...

 

끝내 사약을 받고 비운의 죽음을 당한다.

무인석이다

무인석 옆에는 말이 있다

이는 언제든지 명령이 내리면 달려갈 준비란다.

문인석과 말의 모습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묻는다.

폐비인데 왕릉같다고...

성종은 자신의 사후 100년동안

폐비의 일을 꺼내지 말라고 하였단다.

 

하지만 임사홍은 연산군 등극 후

10년이 지난 후

폐비윤씨의 이야기를 꺼내고

일거에 정권을 잡는다

 

연산군은

얼마나 가슴이 아팠겠는가

하여 어머니의 죽음과 관련된 사람들을

처단하는 사화를 일으킨다.

 

중국의 삼국지에 나오는 내용인지 어떤지는 모르나

사약을 전하라는 명령이 내려지자

고의로 말에서 떨어져

사약 전달하는 것을 면한다.

 

이는 후에 화를 면할 목적으로

행한 것이었으니...

 

사약을 전달한 사람이 무슨 잘못이겠는가

명령에만 따랐는데...

 

하지만 격동기에는

때로 자신의 의지와 무관한 일로

화를 입지 않았던가

 

단적인 예로

한국전쟁(1950년 6월 25일) 시에

살기 위해 따랐을 뿐인데

남쪽에서는 빨갱이로 몰리고

북쪽에서는 미국의 앞잡이로 몰린

사람이 어디 한두명 이겠는가

 

연산군은 사실을 알고 난 후

어머니의 묘를 크게 만들어

회릉이라 하였으며

 

그 유래로

회기동이라는 말이 생겨났단다

 

회기동 경희대 한방병원 자리에 있던

폐비윤씨묘는

이곳으로 옮겨오게 되고

 

하지만 3년 후

중종반정으로 역사는 또다시 뒤바뀌었으니

회릉은 회묘가 되고

 

하지만...

조상의 묘는 건드리지 않는 것이

후손에게 좋다는 믿음으로

연산군이 물러난 뒤에도

폐비윤씨 묘는 그대로 보존이 되었으니...

 

이렇게 아름다운 묘를 볼 수 있는 감동을

후손에게 물려주게 되었다.

조선시대 여인으로 산 폐비윤씨여 ~

당신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

 

지아비를 사랑한 죄이지 않겠는가

하지만

남자의 마음은 변하니

한때는 당신의 미모에 혹하였으나

당신이 나이가 들고

 

어리면서 예쁜 여자들이 보이니

당신의 지아비는 당신을 멀리하게 되었고

어쩌다 한번 의무감에 당신을 찾았으나

보지 않았을 때에는 

와 주었으면 하고 눈물을 흘리며 기다렸으나

보는 순간 화가 나지 않았겠는가

 

어린 여자가 그렇게 좋아요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하지만 성종은

남자가 당연한 것인데

뭘 그런걸 가지고 그러느냐

가겠다하고 일어서니

가지 말라고 붙잡다보니

얼굴에 굵힘이 났고

아침에 대신들이 왕을 보니

왕의 얼굴에 굵힌 자국이 보이니

미천한 왕비를 제거하고 싶었는데

잘됐다 생각하고 제거하자

한마음으로 뭉치고...

 

한편으로는 자신의 딸을

왕비로 앉히려는 욕심까지 먹고...

 

폐비 윤씨여 ~

이제 당신의 묘지는 후손들의

탐방 장소로 변했으니

 

아픔을 이승에 놓으시고

편히 잠들라

고양시 서삼릉 비공개 묘역에 참가한 사람들은

모여 함께 손을 들고 외친다.

조상들아 ~

우리를 지켜봐 달라고

우리들도

조상들의 뜻을 잊지 않고

잘 보존해 후세들에게 물려주겠노라고...

 

또한 언젠가는 서삼릉이

비공개구역이 없는

모든 주민들이 자유롭게 탐방할 수 있는

공개지역이 될 수 있도록 하겠노라고...

 

마두2동 주민센터 길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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