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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행주산성 오르기


고양시청 학예연구사 심준용


행주산성은 고양시 덕양구 행주동에 위치한 덕양산을 정점으로 한 중요 전사유적지로 평가되어 사적 제56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덕양산봉에서 나뉘어지는 산줄기는 동남방으로 진행되며 한강을 끼고 가파른 절벽을 이루고 있습니다. 북서쪽으로 두개의 지맥이 좁은 골짜기를 이루면서 능곡평야를 향해 뻗어 있습니다. 행주산성은 일반적인 통념으로 알고 있는 돌로 된 산성이 아니고 토축의 성벽을 이루고 있는 자연요새를 이용하여, 유사시 급조한 목책과 토석성의 산성입니다. 그래서 북한산성에 위치한 석성 같은 거대한 구조물은 원래 없었던 것입니다.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견고한 구조물 없이 지형을 최대한 활용하여 토성과 목책만으로 성을 구축하고도 승리한 권율장군의 슬기로움에 감탄사가 절로 나옵니다.

지금의 지형과 크게 다른 점이라면 임진왜란 당시 행주산성의 주변은 뻘이 많았다는 사실입니다. 이 지역은 한강과 붙어 있고 지대가 낮아 홍수의 영향으로 뻘을 이루던 지역입니다. 현재의 지형이 형성된 것은 일제강점기인데, 독립운동가인 이가순선생이 고양시의 농민들이 홍수로 인하여 많은 피해를 보는 것을 보고 사재를 털어 관개사업한 결과입니다. 한마디로 행주산성 주위는 자연해자를 두르고 있었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삼국시대 행주산성에서 일어났던 격전에 대한 기록으로 문헌에 남아있는 것은 없으나, 현재까지 잔존하는 산성과 1991년 서울대학교박물관의 시굴조사에서 출토된 삼국시대의 와당 및 토기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삼국시대부터 이미 군사전략상 요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더구나 삼국정립기, 서울지방을 중심으로 한강유역일대를 둘러싸고 끊임없는 전투가 벌어졌던 사실과 한강유역의 최종 지배권을 획득한 신라에 의해 삼국의 통일이 이루어졌다는 것으로서 이곳의 전술사적 가치는 충분합니다.

행주의 지명유래는 몇차례 변동을 겪게 되었는데, 본래 백제의 개백현이었으나 그 지배권이 고구려로 넘어가면서 왕봉으로 개명되었으며, 다시 신라 경덕왕이 우왕으로 개명하여 한양군령현에 속하게 하였습니다. 그 후 후삼국의 과도기를 수습한 고려가 건국초에 행주로 고치고 현종9년(1018)에 양주에 속하게 하였습니다. 그 뒤 조선의 태종13년(1413) 고봉과 덕양 2현을 합하여 고양군으로 하면서 이에 속하게 되었고 이후 신도시가 개발되면서 고양군은 시로 승격되었습니다.

서울에서 행주산성에 오는 길은 무척 쉽습니다. 서울 성산대교 교차로에서 강변대로를 따라 고양 방면으로 7.6㎞가면 길 오른쪽에 행주산성으로 가는 마을길이 나옵니다. 마을길을 따라 0.9㎞가면 길 왼쪽에 행주산성으로 들어가는 길이 나옵니다. 그 길을 따라 0.6㎞가면 행주산성 주차장에 닿습니다. 주변에는 장어 등을 파는 대형음식점이 행주서원 가는 길을 따라 여러 곳 있습니다. 신촌이나 김포공항에서 오는 버스가 있지만 이용객이 많지는 않고 대부분 승용차를 이용합니다. 입장료는 어른 1000원, 청소년 및 군인 500원이며 주차장 이용시 2000원을 받습니다.

행주산성은 언급되었다시피 토성이고 토성은 내성과 외성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외성의 일부구간은 복원되어 있고, 일부는 도로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내성은 현재, 외관상으로 확인하기가 어렵습니다.

입구의 좌측으로는 행주산성 관리사무소와 화장실이 보이고 정면으로는 행주산성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대첩문이 보입니다.

1970년 철근 콘크리트로 신축된 대첩문은 맞배지붕의 홑처마형식으로 제작되었습니다. 원형기둥 위에 초익공을 올렸고, 창방위의 장려사이에는 소로를 배열하였으며 나무 판문은 철엽으로 쌓았습니다. 기단은 장대석 갓돌에다 콘크리트 모르타르로 포장하여 깔았습니다. 정문 옆에는 사고석 담장을 설치했습니다. 지금와서 보면 왜 목재로 짓지 않고 콘크리트로 만들었을까 의문이 들지만 1970년대 당시에는 목조건축물 복원시 콘크리트가 유행했었습니다.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광화문 역시 동일 시기에 복원되었던 구조물로서 콘크리트로 되어 있었습니다.

대첩문을 들어가면 왼쪽으로 행주산성길이 열려 있고 오른쪽으로는 권율장군동상이 있습니다. 1986년 4월 30일 경기도에서 건립하였는데 장군의 투구, 갑옷, 무기류 등은 임진왜란 당시의 것으로 문헌과 고증을 바탕으로 하여 청동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권율장군동상의 주위에는 부조가 있는데, 관군과 승병, 의병, 부녀자가 실감나게 그려져 있습니다. 왜 부조를 굳이 4면으로 나누어 놨을까요? 행주산성에서 승병과 의병, 부녀자가 관군못지 않게 활약했음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요?

임진왜란 초, 관군으로 구성된 조선군은 막강한 조총을 앞세운 일본군의 상대가 못되었습니다. 게다가 일본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전국통일을 이루어낸 경험이 풍부한 병사들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경험이 없었던 조선군은 임진왜란 개시 20일 만에 한성을 내주고 만 것입니다. 하지만 조선민족의 저력은 그리 만만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악착같이 세금을 받아가던 밉디 미운 양반들이 지배하던 조선이었지만 민중은 서서히 조직을 만들어가고 있었고 진주에서, 한산도에서 빛나는 승리를 만들어 내는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특히 행주산성전에서 그들의 진가는 재확인되었습니다. 처영의 승군을 모두 포함한 2,300명 행주산성군은 변변한 석성도 없는 채 200m도 안되는 행주산성에서 7전7승을 이룩한 것입니다. 그야말로 관군, 승병, 의병, 부녀자들이 똘똘 뭉쳐서 이루어낸 성과였습니다. 행주대첩은 권율장군 혼자 만들어 낸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일본군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았을 때, 왜 의병에 대한 준비를 하지 못했던 것일까요? 앞서 언급되었다시피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군은 전국통일에서 잔뼈가 굵은 병사들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곧 그들이 전국통일시의 경험을 바탕으로 전투를 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그것에서 비롯되는데 일본군은 통일전쟁시 의병을 경험해 보지 못한 것입니다. 각 사무라이는 그들이 보유한 군사들로 전쟁을 진행했으며 주변의 농민들은 전쟁과는 비교적 무관하게 생업을 이어갔습니다. 이에 조선에서 일어난 의병은 그들의 계산에 들어가 있지 않은 아주 무서운 ‘변수’였던 것입니다. 이에 행주대첩의 승리는 관군의 승리이기 보다는 ‘관군․의병 연합군’의 합작품으로 볼 수 있을 것이며 권율장군동상 주위의 부조된 사람들은 승리를 이루어낸 그들인 것입니다.

권율장군동상과 부조를 감상했다면 왼쪽으로 다시 올라가보시죠. 올라가는 길을 보면 왼쪽은 노란색이 칠해져 있고, 오른쪽은 검은색 아스팔트입니다. 이것은 신도와 어도를 나타낸 것인데, 왼쪽이 신도가 됩니다. 어떻게 보면 그럴듯 하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유치하고도 합니다. 또 올라가는 길 중간중간에 창, 화차 등 각종 무기가 띄엄띄엄 그려져 있는데 이것도 행주산성에서 쓰였던 무기들을 그려놓은 것이라 합니다. 1970년대 정화사업시 제작된 것들이라고 하니 당시에 유행했던 문화유적 정비방식이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쭉 올라가면 3갈래로 나뉘어 지는 길이 나온다. 왼쪽길은 토성으로 가는 길이고, 가운데 길은 전시관 및 정상으로 가는 길입니다. 오른쪽 길은 충장사로 가는 길인데 충장사에 들려서 정상을 돌아 토성으로 내려오는 것이 답사하기 좋은 코스입니다.

충장사로 들어가는 길 입구에는 홍살문이 있어 들어가는 이에게 진지함과 숙연함을 줍니다. 물론 홍살문과 충장사 모두 콘크리트 건물입니다. 목조건축물을 따라한 콘크리트 건축물을 실제 목조건축물과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입니다. 신도와 어도를 구분해 놓은 길을 지나 충장사 입구에 이르면 오른쪽으로 비석이 있었는데, 이 비가 행주대첩비 중건비입니다. 이 행주대첩비 중건비는 2010년에 원 위치였던 행주서원으로 옮겨졌습니다.

자 다시 앞을 보면 삼문이 정면에 있는 충장사가 보입니다. 충장사는 기공사(현재의 행주서원)에서 유래합니다. 원래 헌종 8년(1842)왕명에 의해 세운 기공사는 한강의 강세가 변하여 홍살문을 세웠던 자리까지 강물이 들어와서 허물어지게 되었습니다. 이후 몇몇 독지가에 의해 복원되었으나 다시 6.25전쟁 때 소실되어 주초만 남게 되었습니다. 당시 기공사의 규모는 정면3칸, 측면1칸, 건평 11.3평(37.4m²)이었으며, 그 앞에 9칸의 소규모의 재실을 두고 그 앞 15m 밖에 홍살문이 있었습니다. 사당을 복원함에 있어서 원래 위치가 한강 물줄기의 변화에 영향을 받는 곳이었으므로 다시 그 자리에 세울 수도 없었고, 산성과의 거리가 멀어 격전지 순례자의 참배가 불편할 것도 고려하여 오늘날과 같이 대첩지내인 산성 안으로 위치를 바꿔 신축하게 된다.

다시 충장사로 돌아와서 살펴보겠습니다. 충장사 사당의 규모는 정면3칸(11.7m) 측면3칸(7.8m), 건평 26.7평(91.26m²)의 겹처마 다포집 합각지붕입니다. 골재는 마루와 문을 제외하고는 모두 철근 콘크리트로 하였고 모서리는 단청을 하였으며 정면엔 빗살문을 달았습니다. 기단은 화강석 장대기단으로 높이 80cm이고 앤타시스식 원형기둥 위에 창방 주두 외에 3포1출목의 포를 짰으며 그 위에 굴도리 및 장혀를 받쳤습니다. 내부는 고주로 종보를 보아지로 쌓아 떠받치고 파연대공과 함께 도리와 단연을 설치하였습니다. 기단에서 3.3m 정도 떨어진 거리에는 2m높이의 장대기단을 쌓았으며 이로부터 12.5m 떨어진 곳에 사당 삼문을 세웠습니다. 그 양측에는 높이 1.5m의 사고석담장이 32m의 길이로 뻗어있습니다. 장대석으로 쌓은 담장의 높이는 1.8m이고 그 앞에 150평(495m²)의 광장이 있고 폭 7.5m의 진입로가 있으며 그 주위에는 잔디를 깔았습니다. 충장사편액은 고박정희 대통령의 글씨라고 해요.

충장사 내부에는 권율장군의 영정이 모셔져 있고 그 앞에 향로가 있습니다. 임진왜란에서 조선을 지켜준 권율장군을 생각하면서 향을 피우며 묵념을 하면 본인의 마음조차 숙연해지죠.

한편 홍수시 범람으로 인하여 복원되지 않았던 기공사터에는 현재 행주서원이 들어서 있다. 정비사업으로 인하여 더이상 물이 범람하지는 않는다. 1997년도에 사당을 복원하는 등 꾸준히 정화활동을 진행하여 현재는 홍살문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설이 복원되었다. 그래서 행주대첩비 중건비도 제자리로 돌아간 것이죠.

충장사 답사를 마쳤으면 이번에는 전시관에 들려보겠습니다. 전시관은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 중턱 오른쪽에 있습니다.

이 기념관은 1978년 당시에는 덕양산봉 대첩비 뒤편에 십자형으로 지었으나 그 위치가 부적합하다는 의견이 있어 1979년에 충장사 뒤편 언덕의 구무기고와 군량창고가 있던 자리로 여겨지는 곳에 다시 신축된 것입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구무기고와 군량창고가 있던 자리로 추정이 된다면 필히 발굴조사를 실시하고 건축을 했어야 할 테지만 당시에는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지금과 같지 못하였으니 바로 건축물이 들어섰음은 매장문화재의 손실측면에서 안타까운 일입니다.

전시관의 규모는 정면 5칸(14.4m), 측면 3칸, 건평 39.3평(129.6m²)의 콘크리트로 된 건물입니다. 내부에는 행주대첩비 탁본, 행주대첩 당시의 무기류와 기록, 독산성전투도와 행주산성 시굴조사시 출토된 신라토기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첨단 시설도 없고 그리 크지 않은 전시관이지만 꼼꼼히 살펴보면 행주산성의 전반적인 상황을 살펴볼 수 있게 합니다.

먼저 독산성전투도를 보시죠. 그림을 보면 권율장군 옆에서 관군들이 쌀로 말을 씻기고 있는 모습이 있습니다. 이것은 독산성전투 당시 독산성과 세마대의 상황을 묘사한 것입니다. 1593년 권율이 이 성에 주둔하고 있을 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이끄는 왜군은 벌거숭이산[禿山]에 축조한 이 성에 물이 없을 것으로 짐작하고 물을 부어 조선군을 조롱하였습니다. 그러나 권율은 물이 풍부한 것처럼 보이기 위해 백마를 산위로 끌어올려서 쌀을 말에 끼얹어 목욕시키는 시늉을 하자 왜군은 이에 속아 퇴각하였습니다. 이때부터 이곳을 세마대라 불렀다 하며, 1592년 여기에 세마대를 세우고 병기창을 두어 무예연습을 하게 하였습니다. 1957년 세마대를 옛 자리에 복원하였습니다. 독산성 및 세마대지는 1964년 8월 29일 사적 제140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이치성전투에 이은 독산성전투의 승리는 일본군에게 있어서 ‘권율’의 이미지를 확고히 자리잡게 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젠 당시에 사용된 무기를 살펴보겠습니다. 행주대첩 당시 일본군 30,000명 조선군 2,300명. 채 1/10도 안되는 군사력이었습니다. 산성에 방어하였다는 유리함이 있다고 쳐도 7전7승이라는 대승을 이뤄냈다는 것은 기적과도 같아 보이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권율장군의 전략, 민관승연합군의 정신력무장 등과 함께 우리가 주목할 만한 것은 행주산성에서 적절히 사용된 무기류입니다. 그럼 전시된 무기를 바탕으로 조선군이 사용하였던 무기류를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각종 총통류가 있습니다. 총통은 천자총통, 지자총통, 현자총통, 황자총통 등으로 나뉘어 지는데 명칭은 천자문의 순서이며, 천자총통이 가장 크고 반대로 황자총통이 가장 작습니다. 총통류는 크기만 다를 뿐 비슷한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먼저 화약을 붓고 격목으로 다진 다음 탄환을 넣고 점화시키면 장군전, 철환 등의 탄환이 날라가는 것입니다. 상황에 따라 탄환의 종류가 달라지는데 함선이나 시설을 파괴할 때에는 길이 2.27m, 무게 33.7kg의 대장군전을 발사하고 인마살상용으로는 조란환 등을 넣어서 활용하였습니다. 격목 위에 무엇을 놓느냐에 따라 다각적인 활용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비격진천뢰(대중소질려포통)라는 무기도 있었습니다. 이 무기는 중완구라는 총통류를 활용하여 발사되는데, 목표지점에 도착한 후 터지게 만든 일종의 시한폭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비격진천뢰도 행주대첩시 크게 효과가 있었습니다.

가장 화려하고 강력한 무기는 화차일 것입니다. 화차는 신기전기와 총통기로 나뉘어 지는데 총통기는 총통을 50여기 연결하여 한꺼번에 발사하는 장치이고 신기전기는 고려말 만들어진 '신기전'이라는 일종의 로켓을 발사하도록 만들어진 화차입니다. 총통기와 신기전기 모두 화망사격 즉, 그물을 치는 것처럼 한꺼번에 많은 공격을 하여 피해를 입히도록 만든 장치인데, 약 20m 반경 내의 적군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었다고 합니다. 특히 '신기전'은 기록에 남아있는 세계 최초의 로켓으로서 화살에 화약을 담은 종이통을 달아 화약의 추진력으로 날아갈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영화『신기전』을 보면 그 무기의 활약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물론 영화인 만큼 약간의 과장이 있음은 알고 봐야 한다. 이 신기전이라는 무기는 고려말 조선초에는 개인용 화기로 지급되었지만 임진왜란시에는 변이중(邊以中, 1546~1611)이 화차에 사용하도록 개발하여 큰 성과를 보이게 한 것입니다.

이에 반하여 일본군은 조총이라는 신무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조총은 네덜란드에서 수입된, 당시로서는 '최신 무기'로서 조선군의 총통과는 달리 '화승'을 이용하여 발사 시기를 조절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또한 정확도가 높았으며 파괴력이 강해 조선군의 어떠한 갑옷도 모두 관통할 정도였습니다. 일본군은 조총대를 3개 단위로 나누어 운영했는데 1소대가 발사하면 뒤로 빠지고 준비하고 있던 2소대가 발사하는 식입니다. 결국 조총을 발사하는 데는 20초 가량의 시간이 걸리지만 3개 단위로 운영되기 때문에 7초 가량의 시간만으로 발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방패로 막을 수 있었던 화살에 반하여 어떠한 방어도구도 관통했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핵폭탄'과 같은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권율은 이러한 조총의 위력을 잘 알고 있었기에 조선군의 장점을 최대한 살려서 방어체계를 구축하였습니다. 일단 덕양산(행주산성)의 입지를 살려 정비하였고 총통, 화차, 진천뢰 등의 대량의 군사를 대항할 수 있는 무기, 공격용 및 방어용 물, 재주머니 등을 준비하였습니다. 정걸장군은 이중으로 목책을 만들었습니다. 게다가 행주산성의 남서쪽부터 동쪽까지는 한강변이어서 수군이 제압한 조선군이 점령하고 있었던 터였고 북동쪽은 강물과 만나는 지역인 지라 질퍽질퍽한 진흙으로 되어 있어서 일본군의 공격이 여의치 않았습니다. 결국 일본군은 행주산성의 서쪽지역을 집중적으로 공략하는데 이는 일본군의 최대의 실수였습니다. 좁은 통로에서 공격하는 대부대는 한꺼번에 공격하지 못하고 7개의 부대로 나뉘어 공격하였고, 지형지물과 화차를 잘 이용한 조선군은 7전7승을 거두는 기적을 연출한 것입니다. 이 하루 동안의 장면은 우리가 잘 아는 '300'이라는 영화를 떠올리게 합니다. '300'에서 스파르타의 왕은 페르시아의 대군을 맞이하여 좁은 지역에서 300명의 군사로 엄청난 숫자의 페르시아 군대를 격파합니다. 다른 점은 '300'은 픽션이고 '행주대첩'은 논픽션이라는 사실 뿐, 전략의 승리라는 점에서는 동일하죠. 전시관에 있는 다양한 무기들은 우리들에게 행주대첩의 위대한 승리를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관건은 듣고자 하는 자가 준비가 되어 있는지 일 것입니다. 물론 전시관의 규모가 작고 설명이 눈에 잘 띄지 않아서 애로사항이 있기는 합니다.

전시관을 둘러 보았으면 다시 정상으로 발길을 돌려보겠습니다. 정상으로 가는 길에 오른쪽을 돌아보면 뻥 뚤려있는 전망이 너무나 시원합니다. 하지만 너무 많은 사진을 찍을 필요는 없습니다. 정상에 올라서면 사방이 터져 있을 테니까요.

올라가다가 보면 왼쪽으로 덕양정과 행주대첩비(구비)가 있습니다. 비각 안에 있는 이 비석이 원래의 행주대첩비인 것입니다. 이 비에는 알쏭달쏭한 전설이 내려오는데 일제강점기 시절, 비석에 금이 가기 시작해 점점 커진 구멍에 커다란 구렁이가 들어와 살더니만 해방이 되자 벌어진 금이 줄어들기 시작하여 지금처럼 쪼개진 듯 남아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덕양정은 70년대 행주산성 정화사업시 지어진 정자인데 한강풍경이 일품이니 감상하시길 바랍니다. 정상에는 1963년에 새로 만들어진 대첩비가 있는데, 야간에 행주산성을 보면 조명을 받아 반짝거리는 구조물이 바로 이것입니다. 정상에서 왼쪽으로 내려오면 충의정이 있는데 원래의 전시관 건물입니다. 지금은 행주대첩 영상관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들어가서 직원에게 보여달라고 하면 언제라도 보여줍니다. 이 동영상은 행주대첩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니 시간이 허락되는 분들은 꼭 보고 갔으면 합니다.

정상에서 눈맛을 시원하게 했다면 토성으로 내려가 보겠습니다. 이 토성은 1991년 시굴조사를 거쳐 총길이 1㎞ 중 450m가량을 복원한 것으로서 오른쪽면이 굉장히 가팔라서 일본군이 쉽게 접근할 수 없었을 거란 추측을 할 수 있게 합니다. 토성의 끝지점 쯤 오면 토성의 문터가 나오는데, 현재는 문터인지 확인이 쉽지 않습니다.

문터를 지나 오른쪽으로 내려오면 다시 처음 뵈었던 권율장군의 동상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행주산성의 답사는 마무리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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