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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

대동문이구나

늠름하게 우뚝 서 있는 모습

성문을 통하여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조상의 숨결을 느끼면서

지나가겠지

이정표가 대동문에서 갈 수 있는 곳을

가르키고 있구나

진달래능선을 타고 가면

우이동 소귀천 계곡으로

아카데미 하우스 방면으로

수유리 4.19 국립묘지로

왼쪽으로는 대남문 방문으로

오른쪽으로는 백운대 방면으로

그리고 북한산 계곡으로 내려가면

산성 탐방지원센터가 나오겠지

하지만 어찌해야 하나

모든 길로 갈 수 있지만

하나의 길만 선택해야 하니...

우리의 인생도 

때로는 이와 같지 않을까

왠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구나

그래서 그런가

이곳이 유난히 넓은 공터구나

또 많은 사람들이 여기저기 둘러 앉아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구나

단풍밑에서 행복한 모습이...

어 ~

넓은 공터만이 아니네

산성옆에도 사람들이

집에서 맛있게 만든 밥을 먹고 있네

술도 한잔씩 권하며

 

그렇다면 시간을 거슬러

산성을 쌓을 때 우리 조상들의 모습은 어땠을까

왜 산성을 쌓으려고 했을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자

                  삼각산은 백운대, 만경대, 인수봉 세개의 봉우리를 말하며

                  이 봉우리 일대의 암릉군(화강암군)은 그 자태가 수려하여 북한산의 으뜸 경관이란다

200년동안 평화롭던 조선반도에

일본을 통일한 토요토미히데요시(풍신수길)가

정명가도(명나라를 정벌한 터이니 길을 빌려달라)를 외치며

조선을 쳐들어왔다

조선은 허둥지둥

제대로 싸움도 못해보고

도망가기에 바쁘고

당시 왕(선조)은

몽진(머리에 먼지를 쓴다는 뜻으로 임금이 난리를 피하여 안전한 곳으로 감을 뜻함)을

떠나게 되고

임진강을 건너 평양으로

 급기야는 의주로..

                             임진왜란 시 이여송이 이끄는 명군과 일본군의 전투 모습

조정에서는 선조의 의주 몽진으로 국가 전체 운영이 불가능함을 알고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왕자인 광해군을 왕세자로 책봉한 후

분조(나라를 나누어 경영)를 하게 하여 전쟁을 지휘할 수 있도록 했다

임금의 피난 소식에 백성들은 분노하였고

궁궐은 불타버렸으며

악화된 민심을 진정시킨 것은 광해군이었다.

광해군은 분조를 이끌고 

의주 - 영변 - 맹산 - 곡산 - 이천까지 나아갔으며

지방 각지를 돌아다니며 백성들을 달래고 의병들을 격려했다

 

                                                              금산에 있는 칠백의총의 모습

광해군의 활약은

분조활동을 통하여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날 수 있게 하고

 ※ 조식 - 정인홍을 이어받은 북인 계열의 유학자들이 의병을 이끌었고

     뒤에 광해왕 시절 정권의 주역으로 활약하게 됨

흩어진 민심을 하나로 모을 수 있게 하였으며

명나라에서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광해군은 왕위에 올라

영화 "왕이 된 남자"에서 전복을 세금으로 바치라는 방납으로 부모를 잃게 된 사연을 말하는

(특산물을 대신 전달해 지고 막대한 이익을 취하는 현실을 개선하고자

광해왕은 대동법을 실시하고자 하였으나 대신들은 반대하고

결국 경기도에서만 실시하고...)

대동법을 실시하고

명나라와 새로이 일어나는 청(후금)나라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하는데...

이와 같은 정책은

임진왜란에서 우리나라를 구해준 명의 은혜를 배반하는 것이고...

대동법은 양반 귀족들의 이익에 반대되는 정책으로

광해군은 사면초가에 빠지고...

                                     인조반정의 성공 후 공신들은 창의문에 그 이름을 새기니...                     

인조반정을 성공으로 이끈 서인세력은

친명정책을 노골화 하고

후금(뒤에 청)에 의한 조선 침략으로

정묘호란에 이어 병자호란을 겪게 되고

인조임금은 삼전도에서 삼배고구도(세번 절하고 아홉번 고개를 숙이는 일)를 당하고

두 왕자(소현세자, 봉림대군) 및

청나라에 항복하는 것을 반대하고 척화론을 주장한 3학사(홍익한, 윤집, 오달제)는

끌려가고

성을 쌓자는 논의가 시작되는데...

축성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에 하기로 하고...

 북한산성의 총 길이는 9.7km가량 되고

 이중 성채만의 총 길이는 8.4km에 이르며

 성벽의 곳곳에 외부로 출입하는 문이 설치되어 있단다

나무 사이로 멀리 백운대 방향을 바라본다

능선과 봉우리로 이루어진 산들이 끝없이 이어지고...

 

소나무 사이로는 활엽수들이 아름다움을 뽐내고...

상록수와 활엽수가 어우러져고

능선의 부드러운 모습이 편안함을 주고

발걸음을 가볍게 한다

멀리 도시의 모습이 아스라이 보이고

힘들고

어려웠던 일들이 사라진 자리에

행복함이 밀려온다

산성을 따라 걷는 이길은

조상들이 열심히 일했던 노고가 쌓여있지 않겠는가

병자호란으로 심양(당시 청의 수도, 후에 베이징으로 옮김)에 인질로 끌려갔던

효종(당시 봉림대군)은 복수심에 불타

북벌론을 꾀하며 성을 쌓기로 했으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갑작스런 죽음으로 중단되고 만다

숙종이 즉위한 후 축성론이 본 궤도에 올랐으며

이 시기 청은

조선에 지원병을 요청할 기미를 보였고...

조선은 의리를 내세워 청의 요청을 거절할 경우

청의 재침을 우려하여 축성론이 부각됐다

 

아 ~ 동장대에 왔구나

날렵하지 않은가

껑충하다고 할까

쓰임새가 무엇이었을까

궁금해진다

동장대의 현판을 다시 한 번 보자

 

동장대는 산성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군사 지휘소라고 한다

장군이 올라서서 전망을 보면서 병사를 지휘하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수많은 병사들이 도열해 있는 모습을...

대동문에서 0.5km를 지나왔구나

백운대까지는 2.5km인것 같고

백운대를 향하여 가는 발걸음이

점점 줄어드는 백운대 거리만큼 좋다 

동장대에서 바라보는 산성 주능선의 모습이다

의상봉 능선을 거쳐

대남문 - 대성문까지...

대성문은 도성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하여

세검정을 지나고

평창을 거쳐서

임금이 드나들 수 있도록 했단다

1992년에 대성문을 복원할 때는

숙종의 글씨를 집자하여 새겼단다

집자란 글씨를 쓰기 위해 옛 문헌이나 비첩사이에서 글자를 찾아

똑같이 쓰는 것을 말함 

인수봉이란 대포알을 세워 놓은 듯한 약 200m의 화강암 봉우리란다

또한 전문 산악인들의 암벽 등반 훈련장으로 명성이 있다

사모바위의 모습이다

비봉을 지나 문수봉가는 길에 위치하고 있으며

사모하는 여인을 기다리는 청년이 그대로 바위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단다

더 자세히 이야기해보자

 

병자호란 시기 사랑하는 남녀가 있었단다

남자는 전쟁터로 끌려가고

여자는 청나라로 잡혀가고

전쟁이 끝나고

남자는 돌아왔는데

여자도 또한 청나라에서 왔으나

몹쓸 짓을 당하고

그 치욕으로

고향에 오지를 못하고

저 북쪽 홍은동 근처에서 자리를 잡았단다

남자가 그 여자를 찾으로 갔으나

찾다 찾다 목 찾아가지고

산 봉우리에 올라가서

북쪽을 바라보면서 하염없이 여인을 기다리다

사모바위가 되었다는...

산성 주능선을 다시 한 번 살펴보자

동장대에서의 각종 설명문을 읽은 후

다시 백운대를 향하여 출발한다

아 ~

아름답구나

멀리 백운대가 보인다.

그래 이 아름다운 단풍을 보고

내 어찌 지치겠느냐

그리고 백운대가 자꾸 커지는 모습에

행복도 자꾸 커지니...

낙엽을 밟으면서 걷는 기분이 어떨까

옆에서 나란히 동행해주는 산성은 어떻고...

등산객의 뒷 모습을 바라보면서

함께하는 사람과의 행복한 모습이 그려지고...

백운대 방향을 향하여 사진을 담아본다

점점 커지는 백운대...

다시 한 번 찍어본다

백운대를 향해 간다는 마음...

목표의식이 생기니 더욱 좋다.

이정표가 나타나 바라보게 된다

대동문에서  1.3km 왔고

백운대까지 1.7km이며

이곳에서 북한산 계곡으로 향하면

산성탐방지원센터까지 4.4km란다

주변의 경치도 조망하면서

백운대까지의 거리가 좁혀져 간다는 생각에

걷는데에 힘이 솟는다

아 ~

용암문에 왔구나

문 앞에 서 있으면

모두가 뚫려있어

바람이 막힘이 없고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이 시원함을 느낀다.

대동문과 백운대가 같은 거리인

1.5km란다

춘분과 추분이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것 같이

의미가 있는 장소 인 것 같으니...

 

어떤 일에 있어서도 팽팽한 균형을 이루다가

한쪽으로 기우는 경우가 있으니

북한산성 축성 논의도 이와 같았으니...

용암문에 대한 설명을 들은 후에 이야기 해보자

용암문 안쪽을 박스형으로 만들었는데

이를 홍예형이라 한단다

암문은 은밀한 곳에 설치하는 것으로

전쟁 시에는 비밀통로로 사용한단다

 

선조임금 시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겪고

인조 임금 시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겪은 후

어느 정도 나라가 안정되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하였다

광해군은 전쟁을 직접 겪어

백성들의 아픔을 알았으며

명분보다는 실리를 추구하였음은

앞에서 이야기 했으므로 익히 알터

명분을 앞세운 서인세력은

광해군을 끌어내렸고

그로 인해 새로 일어나는

청나라의 공격으로 나라의 살림은 더욱 곤궁해졌으며

인조의 둘째 아들인 효종임금

효종임금의 장자인 현종임금을 거치면서

숙종대에 이르러

왕권강화정책을 펼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인현왕후(노론), 장희빈(남인)을 등에 업은

정권들의 부침이 있었으며

숙종은

때로 노론편을

어떤 때는 남인편을 들면서

대규모의 숙청으로

왕권강화정책을 펼 수 있었으며

서울성곽 및 북한산성의 축성이 가능해졌다.

그들의 주장은 다음에 들어보자

현 위치를 보자

앞으로 가야 할 용암봉, 만경대, 백운대라

대동문 가는 방향에는 낙엽이 수북히 쌓이고

가을이 익어가는 모습이...

낙엽에서 나는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히고...

 

조정에서는 이제 본격적으로 북한산성에 대하여

축성을 할 것인지

하지 말아야 하는지

의견을 나타낸다

 

먼저 숙종의 의견을 들어보자

북한산은 백제 온조의 옛 도읍이며, 도성 또한 지극히 가깝다

염려하던 물도 산성 안에 넉넉하다고 하니 지금 축성하는 것이 옳다

큰 계획이 정해졌다면

재력의 많고 적음은 문제될 것이 없다

그곳의 돌을 이용하여 쌓으면 어찌 많은 돈이 들겠는가

백운대가 한층 가까워 졌음이 느껴진다.

우람한 저 모습을...

거대한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암릉군에서 기를 받아야지.

렌즈를 이용하여 확대해본다

백운대의 거대한 모습을 내 가슴에 담아본다

백운대 정상에 모습도 담아보고...

가슴이 벅차 오름을 느낀다

나도 저 곳에 올라가 있는 기분을 느끼고...

줌을 이용하여 당겨본다

나무가 없는

시야가 툭 터진 곳에서 줌을 당겨본다

태극기가 보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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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대 밑의 염초봉, 원효봉도 찍어보고

수려하지 않은가

아름답지 않은가

당신도 올라와 보시라

그리고 아름다운 모습을 마음에 담아보라

정지용의 시가 생각난다

얼굴이야 두손으로 푹 가릴 수 있지만

보고 싶은 얼굴이야 호수만하니 눈을 감을 수 밖에 

백운대로 가는 길은 무난하지가 않네

바위 위로 철 계단이 놓여있어

조심 조심 잡고 간다

하지만 툭 터진 조망은 마음을 시원하게 하고...

한편으로는 바라보이는 계곡이

무서워

가슴을 서늘하고 하고

철계단은 계속 이어지고...

멀리 산사의 모습도 담아보고

원효봉의 부드러운 능선이 어서오라 손짓하네

산성을 조금 크게 찍어보고...

띠처럼 이어져 있는 산성의 모습이 아름답지 않은가

능선을 따라서

돌을 나르고

하나하나 쌓느라

백성들이 힘들었을까

 

숙종임금의 북한산성 축성 주장에 대하여

형조 참판 조태노는 이렇게 반대의견을 말한다

북한산의 험한 지형은 의지하기가 넉넉합니다만

남한산은 밖은 험악해도

안은 평탄한데 비해

이곳은 안쪽 또한 한쪽으로(대서문 방향이겠지요) 경사져서

통행이 쉽지 않습니다

궁궐과 창고를 지울 자리가 마땅치 않으며

백관과 군졸 또한 들어가 머물 곳도 없습니다

더구나 도성이 이미 넓고 커서

방어하기가 어려운데

북한산에 들어가 수비하면서

무슨 힘으로 두 곳을 방어하겠습니까

이에 대한 숙종임금의 반론은 다음에...  

북한산 계곡에는 단풍과 소나무가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고

단풍이 없었다면 소나무의 아름다움이

소나무가 없었다면 단풍의 아름다움이 감소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암석과 소나무와 활엽수가 조화를 이루어

북한산 계곡은

천상의 계곡이 되었다

감상하시라...

백운대가 정말 가까와 졌구나

바위들의 모습도 찍어보고

계곡을 확대하여 다시 한 번 찍어보고

등산객들이 백운대를 오르는 모습을 바라보고

 

드디어 위문이다

대동문까지 2.6km란다

산성탐방지원센터는 3.7km이고...

 

숙종임금은 반대론자에 대하여

북한산성의 축성에 대한 강한 의지를 다시 한 번 하는데

 

도성은 넓고 커서 수비하기가 어렵고

남한산은 나루를 건너기가 어려우며

강화도는 얼음이 얼어 버리면

믿은 바가 물거품이 되고 만다

 

오직

북한산만이

지극이 가까운 까닭에

유사 때에

백성들과 들어가 수비하려고 하니

군량을 조달하는 일 등은

먼 지역과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드디어 북한산성을 쌓기 시작한다

축성 시작 부터 완공까지는 다음에...

 

다음에는 위문에서 북문(원효봉)까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식사동 주민센터 길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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